(아처) 문화일기 154 홀로 서기 (1999-09-02)

작성자  
   achor ( Hit: 869 Vote: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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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화일기


『칼사사 게시판』 34099번
 제  목:(아처) 문화일기 154 홀로 서기                               
 올린이:achor   (권아처  )    99/09/02 15:36    읽음: 34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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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서기, 서정윤, 청하, 1987, 시, 한국

        - 홀로 서기
                                  ―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손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소를 지으며
        체념할 수밖에...
        위태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어느날, 나는
        허전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서고 있었다

          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면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서 멀어져 갈 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만날 때 이미
        헤어질 준비를 하는 우리는,
        아주 냉담하게 돌아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파오는 가슴 한 구석의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5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절실한 결론을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며 어겨보아도
        결국 인간에게서는
        더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6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7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 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초등학교 시절 시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우리에게조차 알려
      질 정도로 유명했던 그 홀로 서기,를 10년도 넘은 지금에 와
      서 짐짓 가세를 가다듬으며 읽어보았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란 이미 유명
      해진 구절로 시작하여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져었다
      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며 잔잔한 그리움을 쥐어주고 
      끝나는 그 홀로 서기.

        처음 홀로  서기,는 평범한 시어로 쉽게  쓰여졌기에 다른 
      사랑을 노래한  어떤 시보다도 마음에 와  닿었다. 그리하여 
      난 미세한 가슴 속의  떨림까지 느껴가면서 참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럽게 시를  읽었었는데, 헉, 아니나  다를까 서정윤도 
      자신이 괜찮은 시인임을 과시라도  하고 싶었던지 시 후반부
      로 갈수록 기존의 여타 시인과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고 말았
      다.

        그리하여 다소 식상하면서도  지겨워졌었지만 어쨌든 누군
      가에게 시집을 선물해야한다면 지금 같아선 난 아마도 이 홀
      로 서기,를 선물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대개 시집 뒷부분에  수록되는 해설란에 박덕규 씨
      는 의외로  기존의 맹목적인 찬양조로부터  벗어나 서정윤의 
      고통의 과정이 생략된 관념적인 시를 지적하는 면이 보여 상
      당히 독특했음을 기록해 둔다. 



990902 13:50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98-9220340 건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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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