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200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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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1118 Vote: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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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실화이다. 나는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내 삶의 황당하고 독특한 기억 중의 한 가지로 남아버렸다.

때는 밤 12시 경.
오시겠다는 형님이 갑작스레 못 갈 것 같다는 연락을 받은 직후 나는 전자신문 명예기자들의 모임에 왜 오지 않느냐는 독촉 전화를 받았다.
알다시피 명예기자 내에서 나는 독보적으로 비우호적인 인물이며, 전자신문에 한 점 도움이 안 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의 전형이었다. --;
그러기에 며칠 전 모임이 있다는 문자를 받았음에도 어느새 깜빡 잊고 있던 터였다.

형님도 못 오신다 하고, 오랜만에 명예기자들도 한 번 만나볼 생각에
그 먼 건대의 길에 나선 건 저녁 9시 경.
신림에서 건대입구는 정말 멀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여정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중간고사나 프로젝트 핑계를 대며 다들 결장하여 참석한 명예기자는 겨우 세 명.
게다가 그 한 명은 내가 도착하자마자 들어가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어찌 허무하지 않을 수 있으랴.
외출을 그토록 싫어하는 내가 가까운 곳도 아니고, 서울의 정 반대편에 있는 건대입구까지
오직 명예기자들과의 해후를 위하여 나섰건만.

그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남은 한 사람과 조촐하게 소주를 마시러 갔을 때,
그 때부터 사건은 시작되었던 게다.

나는 단지 화장실에 갔었던 것 뿐이었다.
일을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였다.
갑작스레 한 여자가 내 뒤로 쪼르르 숨는 게 아니던가.

황당하여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잠깐만 자신을 숨겨달라고 내게 부탁하였다.

이유인 즉슨 내 바로 앞에서 술 취한 한 남자가 술병을 깨부시며 난동을 부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무서워 내 뒤로 숨은 것이고.

사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문자가 와서 그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던 게 내 행위의 모든 것이었다.

아. 그러나 문제는 나의 지고지순한 섹시함!
사건이 해결되자 그녀는 고맙다며 술 한 잔 받겠다고 내게 말했다.

그렇게 먼저 그녀가 우리 자리로 왔고, 이후 그녀의 친구 두 명이 우리 자리에 동참했다.
나는 단지 내 개인적인 일로 전화통화를 하였을 뿐인데
갑작스레 한 여자를 지켜준 영웅이 되어있었다.

다시금 말하지만 이것은 실화이다.
그들은 우리를 2차로 초대하였고, 우리는 초면에 2차까지 함께 하는 건 어색하다는 부담감에 짐짓 거부하였지만
연이은 재촉에 내심 기분은 좋으면서도 끌려가는 척, 힘겹게 2차를 따라 나섰다.

나는 영화 hero를 생각했다.
사실과 달리 영웅이 되어버린 앤디 가르시아.
이것은 참으로 재미있고, 별난 경험이었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226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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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ria2002-05-02 19:40:07
갑자기 한단어가 떠오르는군.."천성"

 achor2002-05-02 20:10:37
이 사건에는 내 능동적인 의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아. 나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혹은 수해자일 뿐이지.

 ggoob2002-05-03 20:52:23
놀라워. 피해자를 가장한 achor의 수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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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