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전화통화, 그리고 늦은 사과 (2003-11-06)

작성자  
   achor ( Hit: 1231 Vote: 21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유래없이 황당한 일이었기에 며칠 지난 일이지만 기록 남겨둔다.



vluez가 교회에 갔던 그 날은 마침 물도, 음료수도 모두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vluez에게 전화를 걸어 마실 것 좀 사오라고 이야기하려 했으나
vluez는 전화를 받지 않았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vluez가 돌아왔을 때
나는 마실 것 좀 사오지, 하며 전화 받지 않은 vluez를 원망하였으나
vluez는 끝까지 전화가 오지 않았었다며 변명을 늘어 놓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 핸드폰 속에 분명히 찍혀 있는 vluez의 전화번호가 이에 대한 반증이었고.



그러나 진실은 잠시 후 밝혀지게 된다.

밤이 깊었을 무렵 나는 아주 오래 된 옛 연인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발신자 정보에 그녀의 이름이 찍힌 것을 보았을 때
반가운 마음보다는 의아하고, 깜짝 놀란 느낌이 먼저였다.

그런데 전화 통화 속에서는
나보다 그녀가 더 의아해 하고 있던 중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그리고 갑작스럽게 내가 전화를 하여
그녀는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결혼을 한다거나 혹은 내가 큰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상상하며
고심 끝에 전화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건 일이 없는 터.



대충 생각해 봤더니 아마도 내 핸드폰의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vluez의 전화번호는 내 핸드폰 속에 11번이란 단축번호로 입력되어 있고,
그녀의 전화번호는 1번으로 입력되어 있다.
(아주 오래된 옛 연인의 전화번호가 왜 1번이냐는 의문은
그냥 삭제하기도 귀찮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넘어가자)

나는 분명히 11번을 눌렀고, 또한 다시 확인해 봐도 vluez에게 전화를 건 것으로 기록이 남겨져 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내 빨간 핸드폰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vluez 대신
훨씬 더 보고 싶은 그녀에게 나름의 의지를 갖고 전화를 연결시켰던 게다.

우리는 오랜만의 전화 통화 속에서
이 황당한 인연에 한껏 웃었고,
요즘은 어떻게 살고 있냐며 근황을 주고 받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무엇이든 좋은 추억이 되어 있기에
그녀는 예전에 내가 서운하게 했던 점들을 웃으며 이야기 하였고,
나는 기분 좋게 그녀에게 늦은 사과를 했다.

그리곤.
이것이 아마도 우리 둘의 마지막 통화가 될 것이라는 걸 서로 인지하며
앞으로의 삶에 행운이 깃들기를 서로 빌어주었다.



깜짝 놀았으면서도 아주 반갑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어쩐지 서글픈 느낌도 났던
조금은 독특하면서도 운명적인 전화 통화였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619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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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