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RPG로서의 태왕사신기 (2007-11-16)

작성자  
   achor ( Hit: 1241 Vote: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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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1.

배용준 주연 MBCTV 드라마 태왕사신기는
광개토대왕이라는 영웅을 다뤘다는 점에서
그간 무수히 존재해 왔던 역사드라마와 비슷하리라 예상됐었다.

그럼에도 제작자들은 줄기차게 이것은 판타지라고 이야기를 해왔었는데
판타지에 일가견이 있는 나로서는
태왕사신기의 정확한 판타지 롤에 새삼 놀라고 있다.

특히나 18편에서 수지니와 서기하가 싸울 때,
수지니가 허벅지에 숨겨둔 단검을 딱 꺼내들던 순간이 그러했다.
RPG를 따른다면 수지니는 그렇게 단검을 꺼내들었어야만 했다.
칼을 사용하여 싸워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물론 여러 조사과정과 전문가들의 도움은 있었겠지만
어떤 면으로 보아도 결코 RPG를 알 것 같지 않은 김종학PD나 송지나작가가
이토록 정교하게 인물을 설정했다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2.
멀게는 북유럽신화로부터,
가깝게는 J.R.R. Tolkien의 반지의제왕으로부터 시작하여
게임 던전앤드라곤으로 완벽하게 정형화된 RPG 롤에는
대체적인 인물의 규칙이 있다.

갑옷을 입고, 장검을 들며, 평균적인 능력을 갖춘 인물과
다소간 야만스럽지만 엄청난 힘을 갖고, 도끼나 햄머류를 사용하는 인물과
천 등으로 된 얇은 갑옷을 입어 빠른 움직임 속에서 활이나 단검으로 싸우는 인물과
로브라 일컬어지는 얇은 옷을 입고 마법을 사용하는 인물.

이런 인물의 설정은
각 인물 고유의 특징을 만들어 주는 것과 동시에
인물들간의 형평성까지도 부여해 주는 일이기에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물론 더 나아가서는 이 인물들의 설정이 조금 더 구체화 될 수도 있는데
방어적인가, 공격적인가에 관해서 나눠지거나
활이나 단검 등, 어떤 무기를 더 본격적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나눠지는 게 그것이다.

3.
담덕:

담덕은 반지의제왕에서 아라곤이 그러했듯이
가장 평균적이고, 보편적이며, 정상적인 인물이다.
게임속에서는 성기사, 팰러딘, 나이트 등으로 표현되는데
모든 사람들이 관념적으로 떠올릴 법한 서양의 기사, 동양의 장군의 형상이다.
이들이 갑옷을 입고, 장검을 사용하며, 평균적인 능력치를 갖고 있다는 점은 완벽히 담덕과 일치한다.
곧 담덕은
마법을 잘 사용한다거나 싸움을 매우 잘 하거나 장검 대신 활이나 단검을 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무치:

주무치는 전형적인 바바리언의 형상이다.
이들은 체형이 크고, 힘이 쎄며,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것으로 묘사된다.
덩치에 맞게 무기 또한 매우 크고, 묵직한 것을 사용해야 하며,
물리적인 전투력에서는 항상 최강이다.
대신 속도가 느리고, 정신적인 면이 부족하여 마법류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곧 주무치는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 되고, 키가 작았어도 안 되며, 그리고 이민족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수지니:

수지니 또한 전형적인 레인저의 형상이다.
가벼운 방어구를 입어 매우 민첩하고, 단검이나 활로 치고 빠지는 식의 전투를 하는 타입.
반지의제왕이라면 레골라스 그린리프가 되겠다.
이들은 링 위에서 복싱을 하듯 1:1로 싸우게 된다면 강하지 않지만
기습과 암살 등에 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곧 수지니는
몸무게가 많이 나갈 수 없었고, 서두에서 말했듯이 장검을 꺼내들면 안 되는 것이었다.

현고:

현고는 반지의제왕에서 간달프가 그러했듯이
매우 현명하며, 지팡이 등을 들고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이 메이지류는 공격적인 위자드와 방어적인 클레릭으로 구분되는 편인데
현고는 후자의 쪽이다.
클레릭들은 평화를 사랑하여 공격적인 능력은 전무한 편이지만
놀라운 마법으로 아군을 치유하고, 보호해 내는 역할을 맡게 된다.
곧 현고는
직접 전투에 나서서 살생을 해서는 안 되고,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되며, 똑똑해야만 하는 것이다.

서기하:

서기하가 현고에 반대되는 위자드의 형상이다.
반지의제왕이라면 백색의사루만.
이들은 지팡이를 들기도 하지만 마법적인 검이나 주술적인 도구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얇은 천으로 된 로브를 입어 물리적인 방어력은 약하지만 매우 강력한 공격성향의 마법으로
상대에게 강력한 데미지를 주는 게 이들의 역할이다.
곧 서기하는
갑옷을 입고 스스로를 방어해서는 안 되고, 칼 싸움을 해서도 안 되며, 역시 똑똑해야만 한다.

처로:

문제는 처로다.
처로에 와서는 좀 복잡해 진다.
기본적인 RPG 역할들은 모두 갖췄지만 응용은 또 다른 몫이 된다.
서양적인 RPG에서는 바바리언류가 물리전투의 탁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많은 무기를 다루곤 하지만
동양적인 RPG에서는 그 태생적인 모델이 반지의제왕이 아닌 삼국지가 되는 편이기에
무기에 따른 분류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유비가 장검을, 관우가 창을, 장비가 둔기를 사용하는 식이 되겠다.
각 무기는
장검이 베기, 단검이 찌르기, 둔기가 치기라면 창은 휘두르는 역할을 하게 되고,
그 공격속도나 공격범위, 데미지 등에서 차이를 갖는다.
장검이 역시 평균적이라면
단검은 빠른 공격속도에 좁은 공격범위, 약한 데미지,
둔기는 느린 공격속도에 평균적인 공격범위, 강한 데미지,
창은 느린 공격속도에 넓은 공격범위, 평균적인 데미지와 더불어 범위공격이 가능한 설정 등이 된다.
처로는 이러한 RPG의 롤 외에도 다른 외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여인 수지니를 사이에 두고 담덕과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그것이다.
담덕이 상대적으로 쾌활하고, 명량하며, 외향적이라면
처로는 조용하고, 사색적이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유년기의 아픈 상처가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설정은 순정만화에서 흔한 것이니 RPG 얘기에서는 패스하기로 하자.

4.
판타지 RPG를 알고 태왕사신기를 본다면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특히나 왜 전장과 안 어울리게 수지니의 치마가 그토록 짧은 지에 관해서 말이다. -__-;

- achor


본문 내용은 6,201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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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