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2003-07-31)

작성자  
   achor ( Hit: 1324 Vote: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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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0.
예비군 훈련을 마친 지도 벌써 며칠 째지만
그래도 첫 동원 훈련의 감상을 남겨두기 위해 몇 자 적어둔다.



1.
여름 여행 후 연잇는 훈련이 귀찮지 않을 수야 없었지만
그래도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었다.
예비군 훈련, 강제력이 커서 문제지만
실총을 쏠 수 있는, 그것도 공짜로 할 수 있는 이벤트라고 생각한다면 그리 나쁠 것도 없을 것만 같았다.
특히 나는 요즘
초등학생 시절에 가곤 했었던 캠핑을 떠나 담력훈련 같은 걸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있던 터였다.

어떤 이는 집총을 거부하며 범죄자의 길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심각할 필요는 없다. 그저 과녁을 겨누는 것이다.
나는 실총을 쏴 본 게 얼마 되지 않아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총을 쏘고, 총알이 날아가는 충격을 가슴으로 전달받는 건 좋은 느낌이 든다.
예비군 훈련이 없다면 어찌 쉽게 M16이든 K1이든을 쏴볼 수 있을까.



2.
4일의 훈련 중 처음 2일은 날씨가 좋지 못했다.
그 2일동안 한 일은 사격과 비디오 상영이 전부였다.

대개의 훈련은 비 때문에 시청각교육으로 대체됐지만
사격만큼은 군 관계자 역시 특별한 이벤트라고 생각을 했던지
우천시에도 계속 됐다.

탕~ 탕~ 탕~

모두들에게 지급된, 거의 고철 수준에 가까운 M16이
정말로 총이 날아간다는 사실에 놀랬다.
이동을 하며 지팡이로 쓰거나 바닥에 앉을 때 깔고 앉던 그 M16이 정말 살상무기였다니.

총을 쏘게 되면 총알이 날아가는 반대편으로 반동이 일어나는데
그 반동은 몸으로 흡수를 해야 한다.
나는 그 반동의 느낌이 좋다.

자. 이때까지는 좋았다.
충분히 이벤트를 즐기러 온 여행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사격한 것을 제외하면 대개 에어컨 펑펑 나오는 강당에서 잠을 자는 게 일과의 고작이었으니.



3.
그러나 비가 그친 3,4일째 부터는 열외 없는 훈련이 시작된다.
물론 예비군 훈련이 고되거나 빡쎌 건 없었다.
대충 시늉만 하면 되었고, 조교 역시 예비군 선배들에게 충실함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예비군 훈련은 곧 시간을 버티기만 하는 그저 소모적인 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한 예비군 아저씨는 말했다.
군대라는 데는 현역으로 입소해 있어도, 또 예비군으로 들어와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상한 곳이라고.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이다. 군대라는 곳.

나는 다시금 군대의 비효율에 치를 떨게 되었다.
3박4일의 예비군 훈련, 만약 전문 교육 기관에 맡긴다면
하루, 길게 잡아봐야 이틀이면 충분히 교육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되었다.
5분 강의를 위해 1시간이 주어졌다.
조교들의 실제 강의시간은 5분 미만이었고,
나머지 55분의 시간은 담배를 피거나 이동을 하거나 그저 앉아서 쉬는 걸로 충족되었다.



4.
역시 군대는 군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북한은 여전히 북괴라고 이야기 하고, 분명히 명시된 적이었으며,
김정일은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최대의 악마였다.

게다가 군대는 남자들만의 세계라서
여성 비하적인 발언은 기본인 데다가 담배라도 피지 않는다면 정말로 심심하거나 인간 관계가 어려울 곳이
바로 군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군대의 보수성은 군대이기에 필요할 것 같았다.
군대가 보수성이 아닌 개혁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쿠테타로 이어질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들은 실제 물리적인 힘이 있고, 거기에다 세상-적어도 조국-을 바꿀 의지가 있다면
그렇게 되리라.



5.
대개 사회의 인관관계는 자신과 연이 닿는, 곧 자신의 상황과 큰 차이를 내지 않는 자들과의 만남일 것인데
군대는 그런 게 없다.
대한민국의 동년배 남성이라면 그가 얼마나 배웠고, 얼마나 돈이 많든
군대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마주서게 된다.
그러다 보니 황당한 인간들도,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도 많이 보게 되는 게 군대다.

다양한 군상을 보며 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했다.
학식이 많거나 지식이 많은 건 삶에 꼭 필요하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하는 짓이 어떤 것인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교육은 필요할 것 같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날씨도 더운데 자신의 무식을 뽐내려 장렬하게 돌진하는 야비군 아저씨들 때문에
더 더운 예비군 훈련이었다. --;



6.
몇 해 전.
내가 훈련병으로 입소하던 시절 내 뒷모습을 바라봐 준 사람들은
지금쯤 어찌 살고 있을까 생각했다.
2003년, 부대 안에 누워 바라본 하늘은 1998년의 하늘만큼 맑고 높았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781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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