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 죽어가며... (2005-03-21)

작성자  
   achor ( Vote: 14 )
분류      개인

1.
갑작스레 통보 받은 예비군 훈련.
그저 보통 때처럼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면 되겠지, 가볍게 생각하곤
그 남자들, 그리고 반공과 보수의 틈바구니 속으로 들어간다.

3월의 햇살이 있는 날이긴 했지만 좀 서늘한 면이 없잖아 있는 날이었음에도
나는 별 생각 없이
여름에도 입는 그대로의 군복 하나 달랑 입고 훈련장을 찾아간다.

그날의 내 엄청난 실수는 그것이었던 게다.



2.
예비군 훈련의 무용성은 이미 몇 차례 말한 바 있다.
한창 바쁠 젊은이들 모아놓곤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예비군 훈련.

서울에서 훈련을 받든, 부천에서 훈련을 받든 다름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모든 예비군 훈련이 그런 식이니 말이다.

출석체크에 대열정리하는 데 이미 1시간은 잡아 먹고,
그리고 시대에 어울리진 않지만 군대에서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반공 성향 가득한 비디오 상영이 이어진다.

비디오 상영은 벌판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강당에서 이뤄졌는데
이곳이 인적이 많은 곳도 아닐 뿐더러
모든 예비군들은 의례 비디오 시청 대신 잠을 자는 지라
내부의 열기도 전혀 없는 곳이다.

즉 나는 그곳에서 엄청난 한기에 시달리게 되었던 게다.



3.
그 한기는 쉽게 참아낼 수 없었다.
다른 이들도 물론 아주 추워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속에 티셔츠나 밖에 군용 점퍼를 입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속옷 한 장 위에 여름에도 그대로 입는 군복 하나 달랑 걸치고 있었단 말이다.

의복 제로, 활동량 제로, 열기 제로.
이 난감한 三無 속에서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추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4.
어쩔 수 없다.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오늘은 포기하고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
나는 조퇴를 해야겠다고 판단한다.
이러고 있다간 내가 쓰러지고 말 것이 틀림 없다.

동대장을 찾아가 나는 너무 추우니 의복을 대여해 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조퇴를 시켜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의 동대장은 내 두 가지 청을 모두 거절했다.
의복도 없거니와 예비군 훈련에 조퇴란 제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견뎌낼 수밖에 없다.

일단 자판기를 찾아내어 뜨거운 음료를 연이어 마셔본다.
별다른 도움은 안 된다.
그 적은 수분으로는 이미 차가워질대로 차가워진 내 몸을 다시 따스하게 할 수 없었다.

방법이 없다.
몸에 열기가 너무 없다.
어떻게든 몸에 열을 좀 내야한다.

나는 강당이 보이는 한적한 구석에서 홀로 제자리 뛰기를 시작한다. --;

당연하게도 나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이런 짓을 결코 하지 않는다.
내 일탈적인 행위는 이미 중학생 시절에 졸업을 한 터.
나는 내 인생에서 해봐야할 개성 표출은 이미 중학생 시절에 다 해봤기에
괜히 튀고자 이런 짓을 할 의사는 결코 없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이곳은 군인들이 즐비하고, 삼엄한 경계가 이뤄지는 군사시설이다.
그 한 곳에서 왠 파마머리의 사내가 서늘한 날씨에 군복만 얇게 걸친 채로
제자리를 미친 듯이 뛰고 있다.
(사실 내 헤어스타일은 멋있는 편인데 군복과는 어떻게든 안 어울린다 --;)

아마도 정상적인 사람이 그런 나를 보았을 때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러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다.

조금씩 몸에 열기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아. 살았구나. ㅠ.ㅠ
내 생명선이 짧긴 하지만 아직은 아니구나. ㅠ.ㅠ



5.
비디오 상영이 끝나고 부천에서 시흥까지 이어지는 산을 한 바퀴 돌았는데
모두들 힘들어 한 그 시간이 나로서는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열나 힘들었기에 열나 몸에 생기가 돌았다.
몸이 따뜻했다. ㅠ.ㅠ

군대란 곳은 이런저런 무용성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커다란 사회적인 장점을 갖고 있다는 걸 생각했다.

바로 사회적인 다양한 계층들이 그런 거죽을 완전히 떨쳐 버린 채
몸둥이 하나로만 부대낀다는 점에서 그랬다.

니가 사회에서 재벌 외동아들이었건, 전국을 휘어잡는 조폭 우두머리이었건 상관 없다.
먼저 들어온 놈이 위이고, 늦게 들어온 놈이 아래다.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는,
일종의 아주 단순한 사회적인 질서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런 사회를 찾아내는 건 다른 현실에서는 결코 쉽지 않다.
비록 이것이 그래서 더욱 민주적이냐, 아니면 그래서 더욱 민주적이지 않냐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지만
어쨌든 그런 독특함만은 적어도 군대의 사회적인 가치를 만들어 주는 듯 하다.

나는 오늘 오직 몸둥이 하나만으로
이 사회적인 가치를 실로 체감했다. ㅠ.ㅠ

그리고 살아남았다. ㅠ.ㅠ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216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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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