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긴다는 의미 (2006-04-22)

작성자  
   achor ( Hit: 1966 Vote: 11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1.
올림피아드가 시작된 지난 해 11월 이래
내 매일의 밤은 치열한 경쟁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하루도 빠짐 없이 보던 9시뉴스를 나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을 뿐더러
내가 타인을 모르고, 타인도 나를 모르던 그 자유로움 역시 종국을 고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심신 모두 고달파진 셈이었다.

그럼에도 그 고달픔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던 까닭은
그 속에서 배어나오는 단물 때문이었다.

나는 그 매일매일의 경쟁에서
대개 승리를 하는 편이었고,
또한 그 승리는 다른 공간에까지 알려질 만큼 대단한 면이 있기도 했다.
단순히 경쟁의 승리자 자리 뿐만 아니라
랭킹 1위의 자리마저도 장기집권할만큼 나는 그 고달픈 경쟁에서
사실 꽤나 괜찮은 성과를 거두고 있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승리의 대가는
단순한 명예가 아닌 실질적인 이득이었고,
그 이득은 여태 내가 가져보지 못한 수준이었던 게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독주가 길어질수록
인간 본연의 시기와 질투는 깊어만 갔고,
나는 그간 나를 전혀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들이 많아지게 됐다.

그것은 그저 조용히 내 삶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픈 내게 있어서
매우 치명적인 일이었다.



2.
그리하여 이번 4월이 시작되며
나는 스스로를 느슨하게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었다.

그간은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에게
너희도 경쟁을 즐기라고, 나는 정말이지 이 경쟁을 즐기고 있다고 말하며
나는 정상이나 너희가 비겁하고, 유치하다는 의도에서 그들을 비난해 왔었다.

그렇지만 경쟁에서 항상 패해온 자들이
내 말처럼 비겁하지 않고, 유치하지 않게,
순수하게 경쟁을 즐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장 극적으로 치달았던 지난 달 말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경쟁의 패자들은 온갖 비열한 수법으로 나를 견제해 왔기에
한편에서는 그런 그들에게 더욱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고픈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또 단순히 유희로 즐기는 나와 달리 처자식 생각해야 하는 생업으로 몰두하는 이들도 있었기에
한편으론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모두가 즐기고자 하는 일인데
결국 나 혼자 즐기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3.
그렇게 스스로를 느슨하게 여기기 시작하니
경쟁에서의 내 승률은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히 내 마음가짐의 문제뿐만 아니라
나와 경쟁하는 타인들 역시 더욱 나를 대비하고, 준비해 왔다는 이유 역시 간과할 수 없으나
나 스스로도 그간 결코 하지 않은 실수들을 연발하며
자멸해 갔다.

나의 영광과 환희는
그 끝을 보이고 있었던 게다.



4.
며칠 전 축구선수 박주영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박주영은 이곳 내 다이어리에서도 언젠가 찬사를 보낸 바 있는,
1년 전 즈음에는 그 대단했던 이가 아니던가.
(http://empire.achor.net/board/diary/1015)

박주영은 기자의 질문에
자신은 축구를 즐기고 있을 뿐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 했다.
잘 하든 잘 하지 못하든, 남들이 칭찬하든 비난하든
내가 축구를 즐기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시절 당시 정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사실은 일본만화의 완벽한 표절이었던 용소야,라는 만화가 생각났다.

그 속에서 용소야는 여러 무림의 고수들과 대결을 펼치는데
언젠가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하도 오래 되어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어느 정말이지 열심히 수련한 한 소년이
용소야에게 도전을 하지만 결국 패하게 되는데
그는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은 정말 열심히 수련을 했으니.

그 때 어느 사부가 나타나 그 이유를 이야기 해주는데,
이유인 즉슨.
용소야는 무술을 즐기고 있다는 이유였다.

의지를 갖고 인위적으로 아무리 열심히 수련한 사람이라도
그 자체를 마음으로 즐기고 있는 이보다는 못하다는, 그런 요지였다.

당시에는 정말 맞는 말 같았다.



5.
그리고 오늘 인터넷에서 이와 관련된 어느 한 글을 봤는데
volcano란 아이디를 쓰는 그 분의 글을 일단 그대로 옮겨놓는다.

"한국인들은 즐긴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것 같다."

거스 히딩크가 2002년 월드컵 이전 가진 인터뷰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
그는 수시로 선수들에게 "즐기는 축구"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아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즐기는 축구라고 하니 승부에 전혀 얽매이지 않고 져도 좋고 이겨도 좋고 라는 식으로 경기 자체의 재미를 강조하는걸로 인식하는것을 봤다고 언급한적이 있었습니다.

히딩크가 말한 즐기는 축구는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따위의, 져도 좋고 실실 웃어대기나 하는 그런 태도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축구를 하면서 발생하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그 상황 자체를 즐겨버리는 강인한 정신력을 두고 한 말이었는데 멍청한 언론은 이걸 이상하게 해석해 버리더군요.

세계적인 축구 강국들일수록 승리를 강조합니다.
승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 최고의 덕목이며 승리를 향한 끝없는 투지야말로 축구 선수로서 가장 권장해야 할 정신적 덕목일 것입니다.

"한일전을 보면 늘 한국 선수들이 존경스럽다.그들의 눈빛을 본일이 있는가? 그들의 승리를 향한 끝없는 투지가 바로 한국에겐 있고 일본에는 없는 것이다. 일본축구가 앞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바로 저것이 필요하다."

"조금만 경기가 밀린다 싶으면 그걸로 끝이다.포기하고 만다. 마지막까지 절대 지고 싶지 않다는 악랄한 승부 근성이 일본에겐 없다. 한국에게 배울 부분이다."

"최용수의 눈을 봐라.저게 스트라이커의 눈이다. 반드시 내가 이골을 넣어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이기적인 투지가 바로 스트라이커 최고의 덕목이다."

일본의 축구 기자들이 머리가 이상해서 저런말을 하는게 아닙니다.

"결코 지고 싶지 않다는 강한 투지,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잔인한 투지를 지닌 선수야 말로 진정 최고의 선수가 될수 있다."

지단이 경기에 임하기전 가장 강조하는 점은 바로 강한 정신력이라고 합니다.
그는 국제 수준의 경기에 임하는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절대 지지 않겠다는 불타는 투지와 강한 정신력이며 정신적으로 강하지 않으면 절대 살아남을수 없는게 냉혹한 승부의 세계라고 강조하더군요.

브라질 선수들이 세계 모든 축구 선수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는 그들의 엄청난 실력과 자신들이 세계 최고라는 무한한 자부심과 승리를 향한 끝없는 투지,
그리고 승리를 향한 과정에서 생기는 그 어떤 어려움에도 결코 미소를 잃지 않는 즐기는 자세에 있다고 합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호마리우 뽑으라던 대통령의 말도 무시하는 승부사 스콜라리 감독은 바로 브라질 사람이 아닙니까?

히딩크가 말한 즐긴다는건 바로 브라질 선수들의 그러한 자세를
말하는 것일 겁니다.
이영표가 한국에선 가장 이런 정신적 자세에 충실하는 선수로 보이더군요.

축구에서 강조되는 정신력은 4가지라고 합니다.
1. 경기에서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승리를 향한 끝없는 투지,
2. 경기에 대한 강한 집중력,
3.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
4. 그리고 그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결코 여유를 잃지 않는 즐기는 자세.

정신력은 가장 강조되어야 하는 최강의 덕목입니다.

정말 즐긴다는 의미조차 모르는 어린선수들...



아래는 최근 한국축구 전문가의 인터뷰 일부 내용 입니다.




"한국의 어린 선수들은 너무나 정신적으로 안일하다. 기술 양성에만 모든 포인트를 두는 협회의 정책은 수정되어야 한다. 극도의 긴장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을수 밖에 없는 승부의 세계에서 끝없이 성장하려면 극강의 정신력이 필요하다.
요즘 한국의 어린 선수들에겐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눈빛이 보이지 않는다."




6.
나는 정말이지 뜨끔했다.

즐긴다는 것,
내 딴에는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단지 그 경기를, 경쟁을 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러나 그것이 결코 경기를 설렁설렁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즐긴다는 것은
정말이지 승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승패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새삼 느꼈던 게다.

내가 지난 날 아무리 혁혁한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그래서 이제 좀 설렁설렁 경쟁에 임해도 된다는 면책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기든 지든 승패는 대충 생각하고,
경쟁하는 그 자체의 즐거움을 찾자는 것은
경쟁의 가장 중요한 미덕인 승리를 향한 노력을 애초에 없애 버리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그것을 즐긴 것이지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비겁한 패자의 변명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 깨달았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6,819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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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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