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 (2004-10-28)

작성자  
   achor ( Hit: 1514 Vote: 7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1.
며칠 전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
나는 내가 행한 가장 재수 없던 행동이 무엇일까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내 몇 해 전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사실은 내가 행동한 건 아니었는데
내 친구의 재수 없는 행동에 반발하지 않고 동조했다는 것만으로도
나 역시 유죄일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몇 해 전 어느 날.
나는 그토록 재수 없는 행동 한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2.
대학 친구 두 명과 함께 있었다.
대학 3학년 정도였던 것 같고, 계절은 기억나지 않는다.
밤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술이나 한 잔 하려고 했는데
친구 녀석은 아가씨가 있는 술집에 가고 싶어 했다.
그 친구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기에
아마도 우리가 술을 마시는 동안 아가씨와 연애나 하려던 모양이었나 보다.

물론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순진하고, 청결한 우리들이 성적인 이유 때문에 아가씨를 찾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저 함께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던 거라고 보는 게 옳다.

돈도 별로 없던 그 시절
우리는 화려한 번화가가 아닌 좀 후질근한 구석의 술집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던 중이었고,
친구 녀석은 여기 가게 문 닫고, 오늘 밤 우리랑만 놀자고
화끈하게 외치던 중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바로 역전된다.
아가씨라 등장한 여인들은 결코 아가씨라 부를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른바 아줌마.
그 공포의 대상만이 우리 앞에 있던 것이었다.

내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 이 추억을 되새기는 건 아니지만
정말 나는 아가씨를 기대하고 찾은 술집에서 아줌마가 나왔다 해도
거칠고 냉정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 녀석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오라며 소리쳤다.
나는 어떤 사정이 있어서 이곳까지 왔을 그 아줌마의 슬픔에 짐짓 가슴이 아팠으면서도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나 역시도 젊은 여자가 더 좋은 것은 분명하고,
또한 이미 친구의 말은 터져나왔고, 저질러진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옆 가게에서 조달해온 조금 더 젊은 여성들이 우리 앞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젊다는 의미만 있었을 뿐
뚱뚱하고 못 생겼기에 우리가 돈을 주고 같이 이야기 하고 싶은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우리가 그녀들에게 돈을 주는 까닭은
평소에 접하기 힘든 아주 아리따운 여인이
우리에게 누구보다도 다정다감하게 이야기 해주었기 때문이어야지,
안스럽고, 불쌍한 이들에 던지는 동정이나 적선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되었다.

그녀들이 등장하자 친구 녀석은
갑작스레 영어로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대단한 영어 실력도 아니었는데
영어에 별 뜻을 두고 있지 않은 나 조차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수준의 회화였다.

그는 물이 구리니 다른 데를 가든가 아니면 차라리 나가서 헌팅을 하는 게 낫겠다고 이야기 했다.

순간 내 얼굴이 화끈거려졌다.
그것은 완벽한 그녀들에 대한 무시였다.

너희들은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니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테지, 하는 그런 인간에 대한 무시의 바탕 위에서 행해진 일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무시하고,
스스로 상대보다 우월한 입장에 있다고 착각하는
정말로 재수 없는 현장 속에 내가 있었던 것이다.



3.
나는 과거 분명히 그런 판단을 싫어했다.
어떤 틀,
나는 대학을 나왔는데, 너는 대학을 못 나왔으니 내가 우월하다는 생각이나
나는 문학을 읽는데, 너는 무협지를 보니 내가 우월하다는 생각이나
나는 클래식을 듣는데, 너는 댄스음악을 들으니 내가 우월하다는 생각이나
나는 예술영화를 보는데, 너는 헐리웃액션물을 보니 내가 우월하다는 생각이나...

그것이 관념적인 것이든, 혹은 실제적인 것이든
인간이 인간 자체보다는 어떤 개체를 통해 편견과 선입견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조금씩 흔들려 진다.
특히 최근에 리2라는 게임을 하면서 그런 흔들림은 더욱 커져만 간다.

당연하게도 전부가 그렇지는 않은데
가끔씩
어떻게 인간이 이토록 유아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지 궁금해 지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이것 역시 선입견일 수 있겠는데
리2를 하는 유저의 수준은 일상적으로 내가 접하는 사람들보다 높아 보이지 않고,
또한 나 역시도 그 유저 중의 한 명으로서 리2를 하고 있다.

그 수준이라는 것.
이것이 나를 헤깔리게 한다.
과거 나는 그 수준이라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 수준이라는 것은 스스로에게 상대적인 개념이라서
아마도 어떤 국회의원은 나를 바라보며 스스로 자신의 수준이 높다고 여기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내 의사와 상관 없이 그에 의하여
나는 그보다 수준 낮은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치다.

그렇다.
두말할 나위 없이 좆나 재수 없는 인간이다. --;

그런데 문제는
나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그러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치명적인 유치함과 극강의 유아적인 행동을 설명해낼 방법도 없으니
참으로 난처하고 난감할 수밖에 없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323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diary/987
Trackback: https://achor.net/tb/diary/987
RSS: https://achor.net/rss/diary

Share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Login first to reply...

Tag
- 리니지2: 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2016-01-27 01:34:24)- 리니지2: 서버 통합 (2012-10-25 16:54:49)

- 리니지2: 내일 뭐할까 (2011-07-18 05:36:35)- 리니지2: 善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2011-03-02 13:26:21)

- 리니지2: 통하였느냐? (2016-04-03 10:54:22)- 리니지2: 게임 해설자 (2008-09-08 00:58:01)

- 리니지2: 어느 어비스의 독백 (2015-04-14 23:08:01)- 리니지2: 안녕 (2009-03-09 02:49:41)

- 리니지2: 가끔 (2009-11-18 00:37:52)- 리니지2: 현수의 결혼 (2009-04-12 15:10:40)



     
Total Article: 1961, Total Page: 273
Sun Mon Tue Wed Thu Fri Sat
          1 2
3
구디의 결혼
4 5 6 7 8
비트 속에서...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123456789 [3]
20 21 22 23
24 25 26 27 28
수준
29 30
31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Poll
Only one, 주식 or 코인?

주식
코인

| Vote | Result |
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추천글closeo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