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맥주에 길들여졌던 적이 있다 (200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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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1831 Vote: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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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부터다.
나는 술을 마신 처음부터 맥주는 좋아하지 않았었다.

마셔야만 한다면 마셔왔지만
그러나 내게 있어서 맥주는 시원하지도 않았고, 달콤하지도 않았으며, 알콜이 주는 환상을 내게 보여주지도 못했다.
배부르고 비싸기만 한 맥주를 좋아할 까닭 역시 처음부터 없었던 게다.

또한 나는 혼자 술 마시는 행위를 경멸해 왔다.
혼자 밥을 먹는다면 배가 고픈 거고,
혼자 영화를 본다면 영화마니아겠지만
혼자 술 마시는 건 그냥 알콜중독인 거라고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샤워가 끝난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캔까지도 말이다.

잘 나가는 드라마 주인공 냉장고 속에 항상 캔맥주가 들어있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완전히 뒤바뀐 건 얼마 되지 않았다.



2.
미드를 좋아하고, 적당한 운동과 적당한 커피와 적당한 영화관람을 하며,
때론 싸우기도 하지만 대체로 화목한 가정과 직장 속에서 이 시대의 매우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 친구는
스쳐 가듯 내게 말했다.


뭐 어때, 그냥 맥주 한 캔 마시는 건데...


내 편향적인 맥주에 대한 반감을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혼자 술마시는 행위를 경멸해 온 내 전력까지도 전혀 알 길이 없던 그 친구가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대충 하고 넘어간 그 말이
내게는 두고두고 깊은 뿌리가 되었다.
사소한 그 말이 내 깊은 편견을 한 번에 날려 버렸던 게다.

맞는 말이었다.
그냥 맥주 한 캔 마시는 것 뿐이었다.



3.
역시 정신적인 힘은 실로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꼈던 날들이다.
생각 하나 바꿨을 뿐인데
그 정신적인 결막이 해체됨과 동시에 엄청난 반대현상이 발생했다.

생각이 바뀐 이후 나는 그 치열한 아덴월드를 맥주와 함께 했다.

내 입장에선 그 작은 캔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탓에
340ml로 시작한 맥주는 1.6l 패트병으로 바뀌었고,
OB블루는 카스아이스라이트로 바뀌었으며,
어쩌다 한 번 마셨던 맥주가 일주일에 5회 가량이나 될 정도로 늘어나 버렸었다.


이쯤되니 내심 고민스러워졌다.
이거 단번에 알콜중독된 건 아닌가.

문서를 좀 찾아봤더니
알콜중독이란 다음 날 일이 있어서 마시지 말아야할 때 그걸 참지 못하고 마시는 거랜다.

당연히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니
다시 하루에 1.6l, 일주일에 8l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을 혼자 마셔댔다.
무슨 하마도 아니고. -__-;



4.
오늘 우연히 본 신문기사엔 보다 자세히 알콜중독에 대해 나와 있었다.
알콜중독을 판별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다음의 케이지 문항이란 것도 있댄다.

▲술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술 마시는 것을 남(동료나 가족)이 간섭하면 귀찮을 때가 있다
▲과음 후 죄책감을 느끼거나 기분 나쁜 적이 있다
▲해장술을 마신 적이 있다

이 중 1개라도 해당하면 알콜중독이랜다.
내겐 해당사항이 없긴 하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이 위 문항만으로 판단하자면 알콜중독에 해당된댄다.
2004년 이 기준으로 삼성경제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직장인 4231명(남 3918, 여 313명) 중 무려 23%(남 23.7%, 여 14.7%)가 알콜 중독.

또 알콜 중독의 초기 징후는 다음과 같다고 하는데,

▲저녁이 되면 술 생각이 난다
▲자기도 모르게 술자리를 만든다
▲다른 취미보다 술 마시는 것이 즐겁다
▲항상 2차를 간다
▲가끔 혼자서도 술을 마신다
▲잠을 자기 위해 술을 한잔씩 한다
▲필름이 끊긴다
▲술 때문에 가벼운 실수를 한다
▲주량을 줄여 말한다

뭐 친구들과 과음하면 필름이 끊기기도 하지만 그야 알콜 중독이라기 보단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해마의 능력상실 탓이겠고.
다른 것보다 매일 밤 맥주 마시게 했던
저녁이 되면 술 생각이 난다는 항목이 매우 예리하게 나를 찔러 왔는데,

이것 자칫 잘못하다간 정말 알콜중독이 될 것 같더라.



5.
뭐 괜히 걱정할 건 없다.
그냥 몇 주 전에 잠깐 그랬다는 이야기다.

내 아버지는 술을 전혀 안 드시는 분이신데
아마도 성장과정에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내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듯 싶다.

곧 이것은 알콜중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성장과정에서 생긴 결막이 단 번에 풀어졌던 경험의 이야기인 셈이다.


다만 한 가지,
1.6l 패트병으로 맥주를 마실 때
나는 국내 시판중인 거의 모든 1.6l짜리들을 다 마셔봤는데,
카스레드는 정말 쎄더라.

심지어 혼자 카스레드 1.6l 마시고 뻗은 후
다음 날 일어나서 어찌나 머리 아프고, 속 쓰리던지...
그러면서도 너무 웃겼었다.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일어나 숙취로 죽을 똥 살 똥 하고 있는 그 내 모습이. -__-;

삶이 무료하다면 한 번 해보시기를.
카스레드 1.6l를 혼자 마시되,
빈속에 안주는 문어발로 한정될 것이며, 또한 매우 빠른 속도로 마셔줘야 한다.
한 가지 추가하자면,
10%의 확률로 카드레드의 환희가 발생하므로
한 번 버텨냈다고 자만하지 말 것.

사실 그간 맥주 맛은 다 거기에서 거기였는데
이번에 엄청 마셔댔더니 궁극적으로는 카스아이스라이트가 최고더라.
확실하니 맥주맛에 구별이 안 감에도 맥주를 마셔야만 한다면 카스아이스라이트로 선택하시길.

이상.

- achor


본문 내용은 6,208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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