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마시다 (2002-12-16)

작성자  
   achor ( Hit: 1993 Vote: 21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근래에 어제처럼 맥주를 많이 마신 적도 없는 듯 하다.
어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맥주만 마시는, 꽤나 배부른 날이었는데
맥주가 원래 그렇게 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돌아와 바로 쓰러졌고, 오랜만에 정상적인 수면 시간에 잠을 잤다.
몇 시간 자고 일어났더니 새벽.
술 기운이 조금 남아있어 그리 경쾌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아침에 일어나는 건 활기찬 느낌을 준다.



어제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였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만난 지 1년도 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알게 된 지 벌써 6년째지만
직접 만난 건 10번도 되지 않으니 대충 수치가 맞아 떨어지는 것 같긴 하다.
제대를 막 했던 그 해,
친구들 별로 없던 학교에 갔을 때 근처에 있던 그녀와 점심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점심시간에 만나 밥이나 차를 짧게 하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짧은 만남은 어쩐지 도회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내 친구관계는 대개 오랜만에 만난다,로 함축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금요일에도 나는 나른한 오후, 근처에 있던 친구와 짧게 차 한 잔 하였는데
그 날의 대화도 여전히 오랜만에 만난다, 우리의 만남은 연중행사다,였었다.

나는 이런 인간관계에 별 불만이 없다.
서로 간에 어떤 작은 부담도 없이 그저 생각날 때면 만날 수 있다는 건
내 성인 초년기, 굴직하게 가슴에 담았던 영화 동사서독을 떠올리게 하여 오히려 좋은 편이다.
느슨하고 은은한 인간관계가 마음에 든다.

그러나 문제라면 언제나 영원한 이별을 내포해야 한다는 숙명.
이런 인간관계는 상시 위험성을 갖고 있다.
누군가 핸드폰 번호를 바꾸기라도 한다면 그걸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린다.
물론 이 느슨하고 은은한 인간관계는
그런 위험성을 감수할 만큼 매력적이긴 하다.



술을 조금 더 마시고 싶다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출근해야 하는 그녀를 떠나보낸 후 돌아오는 길에
두 번째 만난 사람으로부터 우리 사무실 앞이라고 전화가 온다.
돈도 없고, 배도 고픈데 택시는 탔고, 게다가 여자문제로 고통까지 겪는 등
최악의 상황을 연출해 내던 미래의 법조인 친구다.

우리는 동네 치킨집으로 향했는데
친구는 배고프다는 명분을 그대로 실천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양념치킨 한 마리를 뚝딱 해치워 버렸다.
나는 이미 1차에서 맥주를 워낙 많이 마셔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한 끼 안 먹었다고 폭식하는 모습이 하루종일 한 끼도 안 먹었은 나로서는 다소 오묘하게 느껴졌던 건 사실이다.

어느 술집으로 갈까 고민하던 순간 나는 밖에서 한 여인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와 친구 또한 어느 술집으로 갈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곤 우리가 닭집으로 들어온 잠시 후 그녀들 역시 닭집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두 번은 깃털이 날린 옷을 입고, 또 한 번은 반팔 폴라티만 걸친 채
다양한 모습으로 연신 우리 자리로 다가와 나로부터 45도 각도의 1미터 떨어진 위치에서 전화통화를 하곤 했는데
나는 여자 문제로 고통 받는 친구를 위로하고자
그녀에게 눈길을 건냈고, 그녀는 그에 응답을 해주었다.
믿건 말건, 못 생긴 주제에 왕자병에 걸렸다고 비난하건 말건 그것은 타인의 문제고,
어쨌든 내 지난 경력에 비춰봤을 때 이건 100%의 성공 확률이었다.

여자문제 이야기로 시작한 우리 대화는 공리주의와 상대주의의 논쟁으로 비화되어 갔다.
나는 친구의 가톨릭적인 신앙에 기인한 정의는 보편적인 인간의 정의가 될 수는 없고,
결국 스스로 진실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시대의 지도층은 틀린 가능성을 반드시 내포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 하였고,
친구는 극단적인 상대주의,
내가 진리나 가치의 절대성을 부정한 채 공리주의에 입각한 다수의 의견에 무게를 두는 것은
결국 자기 파멸밖에 될 수 없다고 이야기 하였다.

나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토론다운 토론을 한 기분이 들어 어쩐지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친구에게 택시비 쥐어주고 돌아온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011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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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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