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생신 (2004-02-19)

작성자  
   achor ( Hit: 1722 Vote: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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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1.
오늘은 내 아버지의 생신이었다.
니기적니기적 대다가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향한다.

얼마 전 나는 생애 처음으로 어머니의 생신을 놓친 바 있기에
이번 아버지 생신만큼은 좀 잘 챙겨드려야겠다고 내내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닥치니 여전히 게으름과의 사투를 피할 수는 없다.
귀찮아, 귀찮아. --;

생신선물로 봄옷이나 좀 사드려야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역시, 게으른 나답게 상점에 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냥 돈을 조금 봉투에 담았다.

가는 길에 케익도 하나 샀고,
택시는 금새 집까지 나를 안내한다.

택시 속에서 오랜만에 밤거리를 본다.
거리의 불빛들이 어쩐지 아름답게 느껴진다.



2.
케익을 사며 아버지 연세를 계산해 봤더니
어느새 쉰 여섯 살이시다.
내 아버지, 늙으셨다.

학창시절 아버지는 나를 유독 신뢰해 주셨다.
그런 내가 대학 초년, 가출하다시피 독립을 해버렸으니 그 실망감은 상당하셨나 보다.
그래서 사실 대학 이후부터는 나와 아버지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 진 바는 없잖아 있던 편이었다.

그러나 이제 늙은 내 아버지.
그 시절에는 결코 이해 못해주셨던 내 아버지가 이제는 나의 독립을 이해해 주시기 시작했고,
나 또한 나이를 먹어가며 말이 통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내 아버지와 정겹게 대화를 한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가족이 함께 케익을 자르며
아버지의 생신, 그리고 얼마 전 지나가 버린 어미니의 생신을 축하하며
나는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

그리곤 잠시 후 돌아 와 다시 여기는 아처웹스. 사무실.

너무 빨리 돌아가는 나를 부모님은 많이 아쉬워 했지만
밤에 잠을 자지 않는 내 요즘의 습성상
멀뚱멀뚱 밤을 보낼 자신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오징어요리에 미역국으로 아침이나 먹고 갔으면 하셨지만
무얼 먹으러 간 것도 아니고, 얼마나 오래 있느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나는 가족간에 그렇게 직접 얼굴을 맞대며 만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거라 생각했다.

아주 유쾌한 만남이었으며,
심지어 부모님과 영화 관람을 약속 잡기까지 했다.
1년에 한 번, 극장 갈까 말까 하는 내가 말이다. --;



3.
서울의 야경은 때때로 매우 아름답게 느껴질 적이 있으며,
심야의 라디오 방송은 가끔 가슴 뭉글하게 들려올 때가 있다.
오늘 내가 그랬다.

헤드라이트 쏟아지는 가운데 딱딱 끊어지는 음절로 규칙을 이루고 있는 육교 위 표어들이 추억어렸고,
한 직장 초년생의 애환을 무척이나 침착한 목소리로 나래이션 하는 라디오 디제이도 그리움을 자아냈다.

초등학생 시절 반공표어를 지어오라고 해서 고민했던 기억도 났고,
몇 해 전 늘상 밤 시간이면 술에 취해 택시를 잡아타고 한강을 달리던 기억도 떠올랐다.

아버지는 늙으셨고,
나 역시 내 아버지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이를 먹으며, 삶을 유지시킨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612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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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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