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2002-10-20)

작성자  
   achor ( Vote: 7 )
분류      Gallery

일요일 아침을 맞이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평화롭고 상쾌하며 어쩐지 느슨하게 여겨지는 이 기분이 아주 좋다.
물론 평소에 그닥 분주하게 사는 것은 아님에도 말이다.
이럴 땐 햇볕이 내리쬐는 공원이나 경건함이 느껴지는 성당에 가고 싶은 생각까지 하곤 한다.
물론 생각만이다. --;

나는 대개 이 시간에 잠을 잤다.
그래서 이런, 기분 좋은 일요일 아침은 평소 그리 많이 느끼는 건 아닌데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렸을 때 읽었던 외국 소설도 생각나고, 예쁜 여자 아이가 있었던 교회도 생각나곤 한다.
이런 걸 보면 내 유년기에 의식하지 못한 채 접했던 서구문물들이
지금 내가 다소 반서양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긴 이제와서 동양, 서양 구분하는 것도 좀 우습다.

어제 일기예보에서 서울, 경기 지역을 제외하곤 전국에 비가 내린 후 얼음이 얼 정도로 날씨가 추워진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보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서늘하다.

지난 토요일, 그간 미뤄놨던 잠을 대여섯 번에 걸쳐서 짧게, 많이 자 놨더니
꼬박 밤을 샜는데도 아직 말짱하다.
오후에 가족외식이 예정되어 있는데 부디 자다가 못 나가는 불상사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금의 내 소망이다.

오랫만에 살아있는 아침인만큼
나도 다른 이들처럼 밝고 건강한 아침을 먹을 생각을 했다.
이왕이면 밥을 해먹고자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다음 사진을 보라. !_!


사진으로 표현된 모습은 아무래도 그 곰팡이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부족함이 많아 보인다.
직접 눈으로 보면 이 엄청남이 몸으로 느껴져 온다.
또 실제로도 지난 몇 달간 간혹 밥을 하려고 시도했던 그 누구라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밥통을 열어보는 순간 그저 경악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평소의 내 삶을 측은하게 생각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중에는 형님께서 우리의 식대를 영수증 처리 해주시기 때문에 대체로 하루 한 두끼는 단골 식당에서 아주 잘 먹고 있다.
다만 문제라면 혼자 있는 주말뿐. !_!
물론 보통의 경우라면 주말에는 그간 쌓아왔던 공력을 바탕으로 쭉 굶은 후
멤버들이 모이는 화요일에 폭식을 하곤 한다. --+

어쩔 수 없이 밥은 못 먹겠고...
그렇다면 오랫만에 고기를 먹어봐야겠다고 결심한다.
고기라 해봤자 내가 해먹을 수 있는 건 내 주식 중 한 가지인
철판 비엔나소시지 볶음. --;

집을 나서니 날씨가 흐리다.
일기예보대로 지난 밤 비가 조금 왔었던 것 같다.
내내 밤을 지켜줬건만 언제 비가 온 건지...

아침 바람이 정말 차갑다.
질끈 묶어놓은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고, 슬리퍼 속의 맨발이 움츠려진다.
총총 걸음으로 아침 일찍 문 여는 슈퍼를 찾아가 비엔나소시지와 게맛살 한 개씩 사온다.

엇. 옆집 여자다.
이곳으로 온 지가 1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이렇게 가깝게 스친 건 처음이다.
사실 아직도 양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있다.
가끔은 남자가 사는 것도 같고, 가끔은 여자가 사는 것도 같고. 같이 사는 것도 같지만 부부 같지도 않고... --+
이것이 지방으로 이사간 친구가 말하는, 그 도시의 삭막함, 혹은 사생활 보장이던가.
어쨌든 옆집 여자의 몸매는 그럭저럭 봐줄만 하다.
그렇지만 짧은 머리에 웨이븐지, 아줌마파만지 모를 걸 한 건 좀 별로다.
어찌 보면 나이는 나보다 어릴 것도 같고...

이번 역시 서로 눈 한 번 안 마주치고 그저 스친다.
아니 오히려 문을 열고 나오려다 내가 오는 걸 보며 멈짓멈짓하다 내가 들어온 후 그녀가 나온다.
이상하다. 양 옆집 사람들이 우리를 피하려 한다. --;
하긴 뭐 상관 없다. 이상한 파마 머린. --+

자. 요리다.

피자 먹고 남은 핫소스를 찍어 먹으려 했지만 짜놓을 그릇이 없다.
설겆이 좀 해놔야겠다.

아침식사를 하고, 담배 한 대를 피고 있는 이 순간,
나는 아주 평화롭고, 느슨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오랫동안 찾아왔던 동사서독, Divx를 구한 것도 기쁘다.

얼마 전 한 여자로부터 너는 왜 청바지를 입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었는데
나는 이렇게 답변해 줬었다.

조금 어렸을 때는 통이 큰 청바지들을 입곤 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통이 적당한 청바지를 입으려고 하니
어쩐지 청바지가 내게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말야.
청바지는 왠지 밝고 건강한 이미지가 느껴지는데
그런 이미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렇지만 남성용 나팔 청바지라면 입어볼 용의는 있어.

정말 청바지 입은 내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 --;
그러고 보면 반바지류를 제외한다면 밝은 색 하의를 입는 일은 전혀 없었던 것도 같다.
밝은 색 하의는 어쩐지 가벼워보인다는 생각을 그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며칠 후 한 스팸메일을 받았는데
그 메일 속에 소개된 쇼핑몰에서 나는 나팔 청바지를 기어이 구입하고 말았다.
아직까지 배송되고 있지는 않지만 급할 건 없다.
뭐 당장 가져다 준다 해도 당장 입을 것 같지는 않으니.

비록 지금은 여자들이 입는 나팔 청바지를 입고 싶어하고,
또 가끔은 남성용 화장품이나 남성용 치마도 있었으면 생각할 때도 있지만
나는 내가 여성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나는 오히려 내 체형보다는 훨씬 더 남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팔바지를 입든 말든, 게으르든 말든.
이상한 파마 머리들이 뭐라 하든 별 상관은 없다.

다만 날씨가 좀 춥다.
아. 또 다시 춥고 배고픈 겨울이 오나보다. 훌쩍. !_!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590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diary/672
Trackback: https://achor.net/tb/diary/672

카카오톡 공유 보내기 버튼 LINE it!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ggoob
2002-10-20 20:30:50
몸매는 이쁘지만, 오빠의 이쁘지만 마른 다리는 나팔바지를 소화하는데 어려움이 있을거야. 취소하고 그 돈으로 고기 사먹어.-_-;

Name
Password
Comment
reCaptcha



Tag
- 일요일: 생애 최고의 안개 (2026-04-12 06:19:41)- 일요일: 일요일 오훗길 (2023-10-22 19:13:03)

- 신림: 언뜻 본 하늘 (2003-10-29 04:14:28)- 신림: 동네 사나이 (2003-07-22 08:46:27)

- 나팔바지: 나팔바지 (2002-11-18 14:35:42)- 신림: 무대공연 (2002-02-06 03:11:17)

- 신림: 마지막 모습 (2003-07-14 04:52:13)- 일요일: 일요일 오전 풍경 (2011-08-29 02:05:44)

- 신림: 자수하여 광명 찾거라 (2008-04-16 22:04:09)- : (2008-02-11 14:34:59)


번호
분류
파일
제목
작성일
조회수
추천
29Gallerylock 오승현 [2]2002/10/2930905
28Gallery  일요일 아침 [1]2002/10/2047187
27Gallerylock 시월 셋째주 [1]2002/10/18977122
26Gallery  학교 가는 길 [1]2002/10/1129718
25Gallerylock 남편감 [1]2002/10/11797235
24Gallery  코카콜라라이트레몬맛2002/09/21558224
23Gallery  학교 풍경2002/09/18291422
22Gallerylock 주전자 [1]2002/09/1041653
21Gallery  등교 첫 날 [1]2002/09/10486112
20Gallery  칼사사 2002년 8월 정모2002/07/30361520
19Gallerylock 먹고 사는 일에 관하여... [3]2002/07/24542314
18Gallerylock 피의 담배 [2]2002/06/24522511
17Gallerylock 선지2002/06/17436013
16Gallerylock 소시지볶음 요리하기 [1]2002/06/1441759
15Gallerylock 2002/06/0674804
14Gallerylock 갤러리스킨 테스트3 [2]2002/03/27100588
13Gallerylock 갤러리스킨 테스트22002/03/2731325
12Gallerylock 갤러리스킨 테스트1 [2]2002/03/27293412
11Gallerylock 일본으로의 초대2001/11/08468734
10Gallerylock 오늘의 저녁 요리2001/10/27471417
1 2 3 4 5 6 7

  Sitemap
자서전
다이어리
개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기술
문향소
인생
산물
지식
커뮤니티
모임칼사사
혈맹칼사사
성통회96
眞사무라이
게시판
자유게시
질문답변
커버스토리
설문조사
to achor
서비스
MUD
오락실
코인
아처카키
App

  AI for Achor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4/20/2026 21:37:09
추천글closeo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