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의 발렌타인데이 (2003-02-14)

작성자  
   achor ( Hit: 1526 Vote: 13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1.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졸업식이라며 저녁 때 술 한 잔 하자던 고등학교 친구들의 제안도 승락해 버렸었고,
또 잠시 후 그 약속을 잊은 채로 03학번 새내기들을 위한 인터뷰 약속까지도 잡아버렸었다.
게다가 경민이 부친상에 가겠다는 약속까지 잡아버렸으니
정말 요즘은 별 생각 없이 흐물흐물 살고 있었던 것도 같다.

점심 무렵 택배로 초콜릿이 도착했을 때도
이제 곧 발렌타인데이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오늘이 그 날이라고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vluez가 출근한 이후에야 나는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2.
이례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잡아버린 약속들이 넘쳐나던 하루였지만,
게다가 발렌타인데이였지만
그러나 나는 전날을 꼬박 샌 덕택에 결국 잠들어 버린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전화벨 소리에 깨어났고, 잠시 후 또 다시 택배로 장미 꽃바구니가 도착한다.

나는 그렇게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다.
꽃배달 서비스를 이용해 본 적도 없고,
또한 꽃배달 서비스를 받아본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는 생각했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은 일이었다.



3.
이런 것들은 내게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 아무 이상 없이 살고 있건만
발렌타인데이를 맞이하여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그저 방 구석에서 잠이나 자면서
택배를 통해 초콜릿, 혹은 꽃을 받는다는 것.
그리워하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보지 못한 채
낯선 택배 서비스 직원을 통해 그 마음만을 전달받는 것.

그것은 마치 영화나 소설이 지루하게 이야기 하는
현대 도시 문명 속에서의 인간의 외로움을 내게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쓸쓸한 느낌마저 주었다.

나는 진실로 회색빛 도시 위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471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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