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핸드폰 속에서 여인들이 죽다 (2003-02-28)

작성자  
   achor ( Hit: 1940 Vote: 22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오늘 모임의 화제는 단연 주연의 결혼이었다.
모임 내 친구들 중 최초의 결혼일 뿐더러 평소 그의 변태적인 성향을 알고 있던 우리로서 적잖이 그의 부인이 걱정되었던 건 당연지사.
또한 그가 가장 먼저 결혼할 거란 예측은 옛부터 있던 일이지만 어쨌든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니 놀랍긴 했다.

그러나 모임의 근원은 나와 인영의 연이었다.
인영의 홈페이지를 대충 패키지로 만들어 준 게 1여 년 전인데 그녀는 이제서야 고마워 한다.
그런 고마움에 기인한 소개팅을 저녁 식사 한 끼로 대체한 후 하나 둘 친구들을 모은 것이 거대한 번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처음 신림동의 갈비집에서 계획대로 인영이 쏘는 가운데 갈비를 배터지게 먹었고,
이후 술집으로 2차를 가서 꽤나 소주를 마셔댔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만 남다보니 남자 애들만 즐비하다.
자정, 그리고 남자들끼리의 자리...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다.
우리는 지난 몇 차례 소정의 성과를 올렸던 나이트 라스칼라로 향한다.

황당함은 이제부터다.
라스칼라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사실 keqi와 dolpi는 그간 모임 내 대표적인 순딩이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라스칼라에서 펼쳐놓은 공력은
그래도 모임 내에서는 최강의 무공을 갖추고 있는 편이라 일컬어지던 나조차도 결코 이뤄보지 못했던,
초고수의 내공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부킹을 해냈다.
아마도 평소 keqi와 dolpi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쉽게 믿기 어렵겠지만
이는 한 치의 거짓도 포함되지 않는 완벽한 사실이다.

무대에서 나와 keqi, 그리고 dolpi가 춤을 추고 있었고,
내가 잠시 후 먼저 자리로 돌아와 춤추고 있는 그들을 돌아봤을 때
그들 앞에는 두 명의 쌈박한 여인네들이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자. 그들의 이야기는 일단 접자.
그들이 그녀들과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keqi의 홈페이지로 가보라.
나는 그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그들이 그녀들로부터 2차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까지만 밝혀놓도록 하겠다.
또한 그 2차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통상적으로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도
그에 대한 답변 또한 거부하도록 한다.

어쨌든 주연은 무언가 아쉬웠나 보다.
주연과 선웅은 무대에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채 부킹만 하였는데
노력한 만큼 성과는 없었던지
주연은 또 다시 4차로 코엑스 쥴리아나로 가자고 제의한다.

이미 시간은 새벽 3시.
나를 비롯한 우리는 고민을 하였고,
연이어 이틀을 휴일로 남기고 있다는 사실 덕택인지 우리는 그의 제안을 수용, 삼성동으로 이동한다.
새벽 3시에. --+

너무 시간이 늦어져서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란 우려는 기우였다.
쥴리아나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이 가득했다.

잠시 후 우리는 그 까닭을 알게 되는데
그 늦은 시간, 그토록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는 전적으로 섹시 댄스 경연대회 때문이었다.
다소 조직적인 느낌은 좀 났지만
어쨌든 엄청난 남성들의 환호 속에서 상체를 속옷까지 완벽히 벗어버린 채
하체를 은근슬쩍 보여줬던 한 여인이 좌중의 완벽한 동의 속에 1위를 차지한다.

쇼가 끝나자 웨이터 안성기는 엄청난 부킹을 해주기 시작한다.
나는 나이트에서 그토록 양으로 승부하는 부킹을 받아본 적이 처음이었다.
여인이 떠나면 잠시의 여유도 없이 또 다른 여인이 내 옆에 앉아있다.
나는 그저 나이트에 가면 으례 할 수밖에 없는 전화번호만을 따기 시작한다.

TV에서 일부 바람둥이로 알려진 연예인들이 우스개 소리로 전화번호 따는 이야기를 시작한 이후
얼마나 많은 전화번호를 따느냐의 문제는 나이트에서의 역량 차이를 객관적인 수치로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나는 그 어떤 전화번호에도 전화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전화번호를 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나는 상황에 어렵잖게 익숙해 지는 편이다.
그간 내가 아무리 순수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하여도
나이트에 가면 나이트에 간 것처럼 행동해야 함은 당연했다.
그곳이 교도소든, 병원이든, 군대든.
나는 그 상황에 맞게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악하게 행동하는 것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곧 나는 마땅히 전화번호를 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이트로 향했던 나의 숙명이었다.

나는 나를 보자마자 떠나지 않았고, 내가 다시 보고 싶은 여자들을 골라
대충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전화번호를 물어보았고,
그녀들은 전화번호를 순순히 가르쳐 준다. 적중율은 100%.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이트에서의 부킹은 상호간 선택의 연속이다.
먼저 선택권이 주어지는 건 여성쪽.
여성은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웨이터의 강제적인 이끔 이후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
다음은 남성쪽이다.
너 안 가냐? 혹은 가라,라고 직접적으로 말해줄 수도 있겠지만 다소 잔인한 편이고, 전화번호를 묻지 않는 것은 적당한 남성의 선택이다.
또 다시 여성 차례.
남성이 이후 전화를 걸었을 때 모른 척 하거나 쌍욕을 하는 건 여성의 선택.
어째 됐든 그 과정은 장구하고, 복잡하며, 시간 흐름의 연속이다.

특별히 나이트에서 만난 여자라고 편견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중 한 친구조차 나이트의 여자라면 그렇고 그러다며 이야기 하기도 했지만
우리 역시 나이트의 남자였으니 그렇고 그런 놈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
그렇고 그런 년놈이 만나는데 무엇이 문제랴.

다만 내가 싫은 건 어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키워가는 그 과정이다.
아.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래도 하늘에서 사랑이 뚝 떨어져 버리길 갈망한다.
사랑을 쌓아가는 과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멀리서 사랑을 관조하는 입장에서는 사랑하기까지의 과정들이 귀찮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나이트든, 어디든 상관은 없지만
누군가를 만나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쌓아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막막하게 느껴진다.

그리하여 결코 싸지 않은 이 따온 전화번호들을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대로 소각시켜 버릴 게 분명하다.
꽤나 귀엽고, 꽤나 섹시한 여인들이
그대로 내 빨간 핸드폰 속에서 사라져 간다...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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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