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200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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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2098 Vote: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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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D      개인

1.
자정이 넘어 돌아왔다.
신대방과 신림을 가로지르는 복개천 위로 은은하게 펼쳐지는 달빛과 그리고 나를 지나치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속에서
나는 3월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유유히 돌아왔다.
비록 여전히 긴 머리가 다소 예외적이긴 하지만
어설픈 양복차림은 나를 마치 사회의 전형적인 한 구성원처럼 느끼게 한다.



2.
일을 시작한 건 이번 달 초, 그러니까 3월 3일부터였다.
그간 내내 놀기만 하여 금전적으로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머니의 한 방은 내게 치명타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일전에 돈을 많이 벌 때 나는 부모님께 카드 한 장씩 드린 적이 있었다.
두 분은 그간 내가 드린 카드를 거의 쓰지 않으셨는데
지난 달 어머니께서 내 카드로 처음 구입하신 재화는
다름 아닌 냉장고였던 게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대형 냉장고. --+

이유는 내가 드린 외환카드가 3개월 무이자 할부의 혜택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후 어머니는 내게 그 냉장고 값을 주려 하셨지만
나는 그것 받는 것을 거부하였다.
나는 극한의 섹시가이로서 그 돈을 받기에 쪽팔렸다.

그리하여 결국
이토록 밤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3.
비록 계기는 어머니의 냉장고 때문이었지만
나는 내가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만족스럽다.
일도 마음에 들고, 사람들도 마음에 들고, 내 위치도 마음에 든다.

그리하여 빚이나 갚을 요량으로 한 석 달 일할 계획 속에서 시작한 이 일을
1년 정도는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4.
그렇지만 내가 깊은 고민에 빠지는 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지난 목요일,
나는 학교에서 고시생으로 변한 옛 친구를 만났었고,
이태원에서는 함께 법인을 설립할 예정인 미국인을 만났었다.



5.
교수님을 만나 뵙고자 찾았던 학교에서
한때는 문학소년이었고,
또 한때는 도보 등으로 자신의 삶을 화려하게 가꿔 나갔던
정규를 만났다.

지난 해 그가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고향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 했던 게 사실인데
그는 이제 조금은 고시생 티가 나는 것도 같았다.

굳이 정규의 제안 때문만은 아니다.
안 그래도 나 역시 그간 공부를 좀 하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었다.
물론 경진이나 정규처럼 극한적으로 놀다 보니 더 이상 놀 것이 남아 있지 않고,
그리하여 이제는 즐길 것이 공부밖에 없어 공부를 시작하는 마음가짐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게으르고 싶고, 마냥 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냥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결국 별 삶의 의미를 얻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있다.

나는 삶의 길을 분명히 정하고,
그리고 나서 경주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역시.
주먹만 꼭 쥔 에스키모처럼 도치된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어느 순간 깨달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차근차근 배우고, 익혀 나가는 것일 지도 모르기에.

그간의 내 삶을 돌이켜 볼 때
나는 어떤 상황을 맞이한다 하여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고, 그리곤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게 될 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그것이 자기위안이 될까 두렵다.

평생을 아침에 출근하여 비슷비슷한 일 속에서 한치의 여유도 없이 살아가야만 한다면
그 삶의 희생에 대한 대가는 충분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대가의 양은 타인이 아닌, 자기 스스로 쌓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6.
Walter는 가벼운 운동복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만난 지 오래지 않아 혈전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강탈당하는 느낌을 참기 힘들어 했고,
Tristan은 Walter의 유아적인 경제감각에 난처해 했다.
나는 안 되는 영어 때문에 고전하던 중이었고. --+

우리는 4월에 법인을 설립하여 함께 회사를 꾸려나갈 계획이었다.
나는 주체적으로 일도 할 수 있는 데다가 영어도 익힐 수 있다는 점에 만족하고 있었다.



7.
그간은 별로 신통찮게 여기지 않았던 말이긴 하지만
이제와서는 나이 좀 먹었다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다,라는 말을 상기하곤 한다.

나는 요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고시공부나 할까 고민하고 있다.
하긴 포기할만한 것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이제 와서 시작한다면 적어도 서른은 넘겨야 할 것을 알고 있기에
자료들도 찾아보고, 주변에 산재한 고시생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도 있다.
며칠 전에는 국내의 다양한 고시 중에서 내가 볼만한 고시를 추려내기도 했었는데
그 결과는 CTA 정도가 그나마 가장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세무사는 변호사나 CPA와 평균적인 수입은 비슷하면서도
시험 과목이 적을 뿐더러 1차, 2차 과목 또한 유사성이 많아
타인보다 오랜 시간을 투자할 수 없는 내게 있어서 가장 유효할 거란 생각을 했다.
또한 과거 수학을 그나마 잘 했던 내게 잘 맞을 것 같기도 했고.

자. 이제 몇 가지 준비물만 마련되면 된다.
책이나 조용한 고시원 등도 중요한 것이지만 고시생에게는 필수적인 준비물이 있다.
바로 조강지처.

나는 고시생의 신분으로서는 조강지처의 막대한 도움을 받고,
그리고 고시에 합격하고 난 후에는 그녀를 버린 채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새로 만나 결혼을 하면 된다.

이것이 그녀에게 그리 손해나지 않는 까닭은
그녀는 자신의 삶을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조강지처 후보는 지난 장관 선발과 마찬가지로 인터넷 접수도 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한다. --;



8.
올 초에는 벌여놓은 일들을 정리하고자 노력을 했었다.
그리하여 아처웹스.의 대표직도 vluez에게 넘겨주었고,
시민운동도 그만 두었으며,
기타 두루두루 걸치고 있던 무게들을 모두 떨궈 버렸었다.

그러나 내 너저분한 성향은 거역할 수 없다는 듯이
지금 3월에 와서는 다시 일들이 벌여져만 있다.

한 회사의 인터넷을 총괄하고 있기도 하고,
몇 뜻 맞는 미국인들과 4월에는 법인을 설립할 예정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학교도 다니고 있으며,
아처웹스.도 언제나처럼 건재하다.

하나하나 생각하면 나름대로 매력적인 일들인데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어느 하나도 안정적이지 못하다.
곧 안정을 찾고 싶어하는 지금의 내게 있어서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리하여 나는 요즘 아주 고민 중이다.
이러한 일들과 내 만족스런 일상을 동시에 포기하고 고시공부를 할 것인가,
돈 잘 주는 회사나 그냥 다닐 것인가,
미국인들과 함께 사업하며 영어나 공부할 것인가,
아니면 학생답게 마지막 대학생활이나 제대로 해볼 것인가,
끝으로 무엇보다 자유로운 지금의 아처웹스.에서의 삶을 즐길 것인가.

아. 고민 중이다.

ps. 이에 관한 설문조사가 진행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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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사내2003-03-18 03:50:37
잘 고민해보라구. 중요한 거니까. 특히 조강지처. --;

 sugaJ2003-03-18 09:18:23
어느날 문득 운명은 너에게 뭘 해야할지를 가르쳐줄꺼야. 결국 팔자대로 되는거 아니겠냐.. -_-;;

 klover2003-03-18 11:15:15
고시원.. -_-a

 Keqi2003-03-20 23:15:27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다구. 후회없을 단 하나만을 골라보는 건 어때? 근데, 고시원은 정말 안 어울려...

 美끼2003-03-22 14:50:52
넌 항상 고민이잖아..
조강지처 얘긴 좀 웃겨ㅋㅋㅋㅋ 화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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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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