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논쟁 (200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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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1658 Vote: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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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이토록 치열하게 논쟁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곧 주먹이 날아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봐서 기분 좋게 날아온다면 한 대 맞아줄 생각이었고,
그렇지 않고 재수 없게 날아온다면 나도 좀 패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용산에 위치한 사단법인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는
감시단, 여협, 기윤실, 미디어열사 등의 시민단체 대표들과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사람들이
6월에 있을 정보통신문화의 날 맞이 행사에 관한 세미나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원탁테이블 빈 한 자리에 앉는다.

행사에 관한 토론은 저녁 식사차 찾은 샤브샤브 집에서도 계속된다.
운동은 함께 많이 해왔으면서도 기윤실 사무총장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역시 예상대로 나와는 좀 맞지 않아 보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같은 사람과 같은 집단 내에서 시민운동을 한다는 게 좀 짜증났다.

그간 로또나 박진영, 박지윤 사건들을 접하면서도
나는 기윤실은 아집에 사로잡혀 그들만의 윤리를 세상에 강요한다고 느껴오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편견을 이미 갖고 있는 상태에서 기윤실 사무총장을 접했기에
그 반감이 더 컸을련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의 말과 행동은 그 거침 없음만큼 과격함과 무지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미디어열사의 공동대표분 역시 한 차례 오버를 하셨다.
정부가 그들 마음대로 집행하고, 행동하면 될 것이지, 뭔 공청회나 세미나를 열며 그리 분주해 하느냐,고 하시는 게
이 사람,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지금의 참여정부가 가장 잘 하고 있는 점 중에 하나로
국민들에게 묻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행동하는 그 과정이라 보고 있는데
그녀는 그것을 불필요한 행위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러나 나를 더욱 짜증나게 했던 것은
내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나로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안전넷, 그 주관단체 한국사이버감시단의 대표간사 자격으로 존재했던 게다.
그러니 각 단체들간의 조율을 담당해야 하는 위치에서 그들의 대표한테
너희, 잘못 되었다, 혹은 너희, 내 생각과 다르다, 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대체로 할 얘기는 하고 보는 편이지만 그래도 나 역시 사회적인 지라
이것저것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그리 좋지는 못했다.
나도 나름대로 짜증이 났었지만
다른 이들도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경직된 구조에 짜증을 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경직된 문제를 좀 풀어낸 것은 다름 아닌 학연이다.
윤리위원회의 대표로 참석하신 분이 내 대학 선배로,
나와 학연이 있음을 알게 되신 후부터는 좀 너그러워지시기 시작했다.

그 역시 나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 될 수는 없었는데
그런 국민에 관련된 정부의 문제가 고작해야 학연 따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나 역시도 그와 학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후배를 위하여 술 한 잔 사고 싶다고 이야기 했을 때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야
나 역시도 별 다를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실망을 할 수 있었을 뿐.



모두가 돌아간 후 나는 단장과 술 한 잔 하며 독대를 했다.
나는 그제서야 기윤실 사무총장과 미디어열사 공동대표와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였고,
또한 너희들과는 달리 인터넷 실명제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쉽게 시작한 이 이야기는
앞서 말했듯이 고등학교 이후 내 최고의 논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나와 단장은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던 고깃집에서 엄청난 육성으로 논쟁을 하였고,
그것은 적어도 한 주먹을 감수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만큼 치열했다.

나는 인터넷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기능에 대한 해답으로
인터넷 실명을 법제화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이가 오프라인과 동일하게 자신의 실명 인증을 받은 후에야
회원 가입을 할 수 있고,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으며,
심지어 게시판에 글 하나 쓰는 데에도 실명을 인증받아야 가능하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인터넷의 취지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단장의 말 또한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미성년자, 또 성인들까지도 음란물과 폭력물에 빠져 살인이라든가 강간 등의 사회적인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는 있는데
지금까지도 인터넷 상에서 그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해 놓지는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또 피해자가 결코 적은 수치는 아님에도
나는 제대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 선량한 많은 이들의 행동에 전체적이면서도, 법률적인 제한을 가하는 것은
결코 타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대화는 서로 무너지지 않을 산을 만들어 가며 더욱 굳건해 지고 있던 중이었고.



단장의 성격은 꽤나 화끈했기에 아무리 치열한 논쟁이 있다 하여도
나는 그 결말만큼은 역시 화끈하리라 예상했다.
술이 좀 들어간 막판에 가서는 술 앞에서 서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봤던 게다.
치열했다 한들 그 논쟁은 이 술자리의 안주의 역할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장은 내가 평소와는 달리 좀 예의를 가리지 않고, 극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에 실망을 했든지
혹은 자신만큼 해보지도 못한 내가 시민운동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사실에 답답했든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술자리는 내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끝나게 된다.



역시 인간관계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 어떤 적의 없이 궁극적으로는 감시단을 위하여 이야기 했던 것인데,
인터넷 문화를 이야기 하는 시민단체로서 인터넷 실명제를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의견과 상충된다는 게 결코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인데
내 부족한 말주변과 미숙한 행동 때문에 오해를 낳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후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시민운동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하여도
내 생각과 뜻을 이야기 할 수 있었다는 점은 만족한다.

그렇지만 나 역시도 사람들과 논쟁할 때 쉽고, 편안하게 들어내는 자세는 더욱 배양하긴 해야겠다.
물론 그야 연륜이 쌓여야 가능할 법도 하다만.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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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thers2003-05-20 23:45:58
우리나라에서 토론문화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심지어 학술행위를 하는 학교에서조차 토론은 너무도 먼 길이다. 토론은 논리적인 이야기를 주고 받고, 논리적으로 남을 설득시키는 것인데 자네도 느낀 것처럼 그리고 나도 언제나 느끼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 감정을 배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말이다. 게다가, 이런저런 관계까지 재수없게 얽혀있다면 토론이란건 태생 자체가 불가능한거 아닌가? 어차피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일진데, 남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의 부재도, 그리고 남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부족한 우리사회는 언제쯤 토론문화가 자리 잡을 것인가? 게다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뛰어난 토론자들은 언제쯤 나타날 것인가!

오늘 토론 수업에서 잔뜩 깨지고 돌아온 bothers -_-;

 Keqi2003-05-21 08:30:40
늘 그렇지만,

"곧 죽어도 뽀다구"라는 자세로.
약간은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토론을 주도할 때,
사람들은 그 흐름에 끌려오게 되지.

사람들을 토론을 통해 "세뇌"시키는 것도 의외로 간단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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