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 훈련을 받으며... (2004-06-15)

작성자  
   achor ( Hit: 1168 Vote: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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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1.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예비군 훈련은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시스템 중 하나이다.

한창 자신의 일터에서 묵묵히 땀 흘려야할 나이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모아다 놓고
하는 일이라곤 그냥 좀 걷거나 나무 그늘에 앉아 수목을 바라보는 게 전부이다.
차라리 현역은 빡세게 훈련을 하기라도 하지,
예비군은 실제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결코 예상하지 못할만큼 널.널.하.다.



2.
그런데 정말 오묘한 건
그런 널널한 예비군 훈련이 힘들다는 사실이다.

진심이다. 꽤나 힘들다. --;
처음에는 내가 원체 외출을 하지 않았었기에
그 조금 걷는 일이나 햇볕을 받는 것이 유달리 곤혹스러운 건 아닌가 의심해 보기도 했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훈련에 참가한 아저씨들 모두 힘들어 하고 있었다. --;

예비군 훈련은 한 마디로 시간과의 싸움이다.
어떻게든 법에 정해져 있는 의무 시간만 버텨내면 되는 일이다.
그 버티는 과정에 있어서 잠을 자든, 전화를 하든, 혹은 무엇을 하든
통제가 좀 있을 수는 있지만 사실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오늘까지 이틀동안 진행된 이번 훈련에 있어서 제대로 이루어진 건 사격이 유일할 뿐
나머지 그 수많은 시간은 잠을 자거나 줄담배를 핀 게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반드시 소집에 응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꽤나 힘들다는 것은
예비군 훈련이 안고 있는 커다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3.
힘들다는 것 외에도 나를 정말 짜증나게 하는 것은
그 칙칙한 남성들 사이에 갇혀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건 남자 애들끼리 술을 마신다거나 축구를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 백 명의 남자들이 한 곳에 모여 며칠을 버티게 된다는 것은
남자들이 안고 있는 지독한 면을 남자, 스스로 깨닫게 만들어 버린다.
나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는 남자들의 모습에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다.

역시 가장 크게 부각되는 문제는
남성과 함께 세상을 양분하는 여성에 관한 일들이다.

다른 하나의 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그간의 삶을 통해 체득하여 온 도덕과 양심, 체통과 사상까지도 모두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엄청난 것이었던지
남성들만의 공간에서는 종종 여성이 심각하게 비하되기 일수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렇게 비하되는 여성을 상상해 보곤 한다.
분명 얼굴은 지독히 못생겼을 것이고, 뚱뚱하고 멍청하며, 사랑 받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왔으리라.
그러니 저런 남성과 가깝게 지내고 있겠지...

별로 잘난 것도 없어 보이는 그런 남성으로부터 비하되는 여성이라면
그 여성 역시 그렇고 그런, 내가 별로 가엽게 여기지 않아도 될 여성이라고 결론내리며
항상 위안을 삼곤 한다.



4.
그렇지만 그런 남성이 그런 여성에게 전화를 걸어
별로 의미도 없어 보이는 통화를 할 때면
사실 좀 부럽기도 하다.
예비군 훈련은 정말 힘들면서도 또한 꽤나 심심하기까지 하다. --;

나로선 좀 억울한 면이 없잖아 있다.
애초에도 전화를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 역시 한 때 잘 나가던 때가 있었단 말이다.
전화통화를 하고자 한다면 누구를 골라야 할 지 모르던 행복한 고민을 할 때가 있었단 말이다.

그러나 나는 각각의 여성들 또한 나름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결혼적정기가 되어 가는 여성들에게 전화를 걸지 않기로 결심해 왔는데
이 남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행복한 삶을 살아가라며 놓아준 물고기가
어느 난폭한 어부의 그물에 다시 잡혀버린 그런 느낌을 받는다.
난폭한 어부에게 잡아먹힐 바에야
나처럼 온순하면서도 친절하고, 게다가 섹시하기까지 한 어부에게 사랑 받는 편이 낫지. 암. --;



5.
그래도 예비군 훈련에 즐거움은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실탄을 장전한 총을 당당하게 발사할 수 있다는 것.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 집총거부 파동 덕분인지
올해는 여느해와는 달리 사격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굳이 의무성을 부과하지는 않았다.
또한 예상 외로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비록 훈련소만 나왔다 하더라도 어쨌든 이미 실탄을 쏴 봤을 예비군 사이에서 말이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나 역시 사격을 한다는 것이 일종의 유희였을 뿐이었다.
살생을 목적으로 하는 사격이라는 그 개념은
알면서도 전혀 체감되지 않은 채
일상에서 금지된 행동을 한다는 희열이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올해는 조금 달랐다.
실탄을 장전한 총을 들고 있으면서
누군가가 순간 다른 생각을 품고 총을 난사한다면
이대로 나의 생이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시작했던 게다.

좀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 사격은 재미있는 일이긴 하지만.



6.
내일, 2박 3일의 예비군 훈련 마지막 날을 앞두고 자야하는데
새벽 4시 30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사실 나에겐 혼자 일찍 일어난다는 것이 너무 큰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지라
아예 포기해 버리고 밤을 새어버린 것이다.

아직 2시간을 더 버텨야 할 것인데,
아. 자, 말아. --;
졸리긴 졸린데 말야. ㅠ.ㅠ
이럴 때 누가 좀 깨워주면 얼마나 좋아.
흑. 어서 결혼을 해야지. ㅠ.ㅠ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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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2004-06-17 02:10:42
음. 결국 글을 쓰곤 졸다가 예비군 훈련 지각. --;
그러나 운 좋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사 통과. ^^;
이로써 이번 동원예비군 훈련은 끝. ^^v

 carina2004-06-22 21:25:03
내가 아는 이는 그것을 예비군복의 탓이라고 하더군. 그 옷만 입으면 너무너무 피로해진다나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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