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2004-08-27)

작성자  
   achor ( Hit: 4243 Vote: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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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perience

1.
새벽 4시.
이대로 잤다간 아무래도 제 시간에 일어나지 못할 게 분명하다란 생각을 하며 잠이 든다.

역시 결과는 예상대로다.
졸업식이 시작한다는 10시에 정규 전화를 받고 깨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으며 나설 준비를 한다.

용민에게서 전화다.
그는 정장을 입고 간다고 말해주었다.
용민이 아니었으면 대충 캐쥬얼 차림으로 갈 뻔 했다.
처음 겪는 졸업식인 만큼 나는 매우 서툴렀다.

더운 데 넥타이까지 매야하나 고민하다가
넥타이는 포기한다.

서두르자. 이러다 모든 게 끝난 후 도착하겠다. --;
9년만에 졸업하는 건데 그래서는 안 되지! 불끈!



2.
학교에 가까워갈수록 내 생각과 다른 풍경에 놀라움이 커져간다.
예상과 달리 엄청나게 많은 인파와 그리고 하나 같이 정장 일색인 사람들.
부모님 없는 사람이 하나 없고, 친구들 없는 사람이 하나 없다.

그나마 용민 덕택에 정장 흉내나마 냈음에 안도했고,
학교에 아는 친구들 거의 없음에도
운 좋게 용민, 정규와 같이 졸업할 수 있음이 다행이었다.

우리는 사전에 졸업장 받고, 사진 몇 장 찍은 후
우리의 늦은 졸업을 자축하며 술이나 한 잔 하기로 했던 터였다.
남들이 자신의 졸업식을 어떻게 근사하게 하든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축하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나 사실은 그러지 못했다. !_!

이 치사한 것들이 배신을 때려버린 것이었다.
용민은 고향에서 올라오신 부모님, 그리고 결혼할 그녀가 나타나 정신 없었고,
정규 또한 없던 여자친구가 갑자기 생겼던지 엄청난 애교를 선사하는 그녀에 휩쌓인 상태였다.

요즘 졸업식, 누가 부모님 오냐며 오신다는 내 부모님 말린 나이건만
우리 멤버들, 축하해 주겠다고 온다는 걸 괜찮다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고 말 거라고 끝내 거부했던 나이건만
이 치사한 것들! 배신을 때리다니. 흑흑. !_!

졸업식이 두 번째라면 결코 이런 일 겪지 않았겠건만
처음이란 이유로, 그 서투룸에 나는 좀 쓸쓸한 졸업식이 되고 말았다.



3.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학교라는 생각 속에서 교정을 거닐고 있으려니
수많은 추억을 함께 했던 그 자취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나를 더욱 감상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담배를 결코 피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나를 어느새 골초로 만들어 버린 명륜당 뒷뜰이나
화창한 햇살 아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마음껏 자유를 음미했던 그 금잔디광장,
산목이 우겨진 수풀 속에서 하루키며, 류며, 책을 읽다 낮잠도 자고 했던 학교 뒷 산의 정자.

마냥 젊기만 했던 그 시절들이 어쩐지 슬픈 기억이 되어 나를 더욱 쓸쓸하게 했다.

참으로 좋았던 그 대학생이란 신분도 이제 끝이라는 게 너무나도 아쉬웠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있을 수 있었던 젊음이 가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슬펐다.

앞으로는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지라.
예전처럼 하루하루를 의무방어전 치루듯 버티는 건 이제 불가능할 것이리라.
마음껏 대학시절을 즐겼고, 그렇게 늦게 졸업하는 만큼
무엇이든 더욱 열중하고, 노력을 경주해야함이 분명할 것이라.

별로 자신은 없다.
이제는 졸업생이 되어버린 변화된 신분임에도
나는 여전히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생산적으로, 이 지겨운 인간들과 치열하게 부딪히며 살아가야 한다는 게 너무 값싸게만 느껴진다.



4.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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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리브숲2004-08-28 01:16:55
축하해! 나의 졸업식날 네가 방송으로 전람회의 <졸업>을 틀어주던 기억이 난다. ㅋㅋㅋ 뭔가를 끝낸다는 거.. 지리하지만 괜찮은 일이지? ^^*

 Keqi2004-08-29 13:20:26
그 날 저녁, 결국엔 휴가를 쓰는 것보다 더 못하게 되어버린 날, 혼자 단골 바에서 밤새 술잔을 비웠구먼. 당신은 왔는데, 나는 못 간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얽매여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씁쓸하였어. 금욜 밤에 술 한 잔 하자.

 ssiny2004-09-09 09:53:40
늦게남아..졸업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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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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