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박걸이여, 각오하라! (2003-06-25)

작성자  
   achor ( Hit: 1692 Vote: 12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1.
지난 월요일 시작된 나머지 수업.

이것은 8월 졸업예정자를 위한 특별 교육으로 아주 살벌한 면이 있다.
이른바 Three Strikes Law로서
세 번 결석하면 졸업을 불허해 버린다는 학교측의 협박을 나는 이미 받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예측 가능하게도.
졸업하지 못하는 것도 비참한 일이지만
협박에 굴복하는 것 역시 비참한 일인지라
예상대로 지난 월, 화.
2번의 수업 중 2번 다 결석한 나는 오늘 그 최후의 날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2.
지난 이틀간 졸업하지 못하게 될 것을 불사하면서도 수업을 거부했던 핑계는 분명히 있다.

나는 안경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사실 컴퓨터 앞에 앉아있지 않을 때면 대개 안경을 쓰지 않았으면서도
안경이 없다는 것은 꽤나 불편한 일이었다.
0.1은 세상을 뿌옇게 보기에 충분한 시력이었다.

특히 스타를 할 때 고스트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불편. --;



3.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졸업은 해야지.

막상 학교에 가니 기분은 좋아진다.

방학을 맞이한 학교는 한적하였고, 온통 여름의 향기로 가득하였다.
특히 서울 학교와는 달리 많은 수풀이 우거져 있는 그 자연의 모습이 왠지 모를 편안함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지난 여름 일본에서 보았던 동북대의 풍경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시내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여유로움과 넓은 교정, 그리고 방학의 허전함이 그런 유사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길에서 만난 몇 얼굴만 까만 여자 얘들도 일본풍이었다. --;

수업도 좋았다.
나는 졸지 않고 세 시간이나 되는 수업을 들어냈다.



4.
그리곤 학교 앞 안경점에 들려 렌즈를 샀다.

몇 년 전 렌즈를 끼다 눈에 상처가 난 적이 있다.
양눈을 붕대로 감은 채 아무 것도 보지 못하면서 살아봤기에
렌즈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안 보이는 데 장사 없다. 어쨌든 좀 봐야 뭘 해먹지.

몇 년 전처럼 안경점에 앉아 렌즈를 껴본다.
역시.
잘 들어가지 않는다. --;
그 시절에도 렌즈 한 번 끼려면 30여 분은 기본으로 소요되지 않았던가.

너무 힘들게 꼈더니 이번에는 예전처럼 빼는 연습은 안 시켜 준다.
점원 역시 내가 렌즈를 빼낸 후 다시 넣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리라. --;



5.
운전면허를 따고, 렌즈를 끼고, 학교를 다니고...
요즘 내 삶을 보면서 나는 이제서야 사회화 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별 것 아닌 일들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운전면허를 따기도 하고, 렌즈를 끼기도 하고, 학교를 다니기도 한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저녁이면 씻고 잠이 든다.

누구나 다 자연스럽게 했던 일들을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지금에서야 하나하나 시작해 보고 있다는 게 좀 오묘하게 느껴졌다.



6.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가족간의 저녁 식사가 있는 날.

배부르게 회를 먹고 귀가.



7.
자. 이제. 너희.
쌈박하지도 않으면서 내 나쁜 시력을 빌미로 쌈박한 흉내 냈던 그대들이여.
단단히 각오하라!

나는 이제 렌즈를 꼈노라.
이것은
너희의 기미와 주금깨, 잔주름, 점, 여드름, 종기 등 그간 보지 못했던 단점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너희가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파운데이션을 더 두텁게 한다 하여도 나는 그 두터움의 정도를 mm 단위로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니라.

너희.
그간은 내가 잘 보이지 않아서 그저 예쁘게만 봐왔다만
너희.
이제 그런 나의 관용을 바라지 말 지어니.
너희.
쌈박하지도 않으면서 내 나쁜 시력을 빌미로 쌈박한 흉내 냈던 그대들이여.
더 이상 내 앞에서 공주처럼 군다면 가차 없이 처단의 칼날을 날릴 것이니
단단히 각오하라! --;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819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diary/867
Trackback: https://achor.net/tb/diary/867
RSS: https://achor.net/rss/diary

Share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yahon2003-06-26 22:03:43
오!! 축하한다. 내가 친히 거울하나 선물해주마!

 klover2003-06-27 09:47:16
흐흐흐- 이제 너의 얼굴에 있던 무수한 잡티들을 알아버렸겠구나 !_!
가슴이 아푸다..

Login first to reply...

Tag
- 졸업: 무소유 (2001-11-21 13:53:16)- 졸업: 듣는 행위는 문자보다 선행한다 (2003-06-18 16:26:09)

- 졸업: 졸업앨범 촬영 (2002-05-29 12:52:25)- 졸업: 불합격 (2003-06-06 00:13:05)

- 졸업: 월요일에 승부다! (2003-06-07 21:05:26)- 졸업: 졸업시험을 보고... (2003-05-18 03:11:36)

- 졸업: 내일 낙방을 한다면... (2003-11-29 03:09:45)- 졸업: 盡人事待天命 (2003-01-14 13:07:56)

- 졸업: TSP 모형 개발 (2003-06-08 22:52:45)- 졸업: 위기 No.2 (2003-05-31 13:10:38)



     
Total Article: 1961, Total Page: 273
Sun Mon Tue Wed Thu Fri Sat
1
Genetic Algorithm을.. [2]
The Matrix
2
2003년 6월 3일 새벽..
3 4
너희의 그 하얀 망..
말하지 않아도... [2]
갈까, 말까 [1]
하필이면 A양
5
불합격 [1]
6
20030606 샤워실.. [5]
20030606 발 [1]
7
벗, 정규에게...
월요일에 승부.. [2]
8
고딩에게 담배를..
TSP 모형 개발 [5]
9
人生事塞翁之馬
보아 [3]
10
사진 몇 장 [1]
효리나 지혜
11
힘내라! K씨여! [1]
12
20010901 sugaJ를.. [1]
행사를 마치고...
13
사랑의 방식
14
15 16
새 살림 [1]
17
듣는 행위는 문.. [3]
18
선영 [2]
19
대학 마지막 시.. [1]
20
새 사무실 계약 [4]
21
22 23 24 25
쌈박걸이여, 각.. [2]
26 27
방배동에서...
28
29 30
조민기를 사랑.. [2]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Poll
Only one, 주식 or 코인?

주식
코인

| Vote | Result |
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추천글closeo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