盡人事待天命 (200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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盡人事待天命.

지난 대선, 선거를 하루 앞둔 날이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는 자신 있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盡人事待天命 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그의 그런 대답이, 적장임에도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대답을 할 수 있는 자라면 결과에 승복할 수 있으리라 보았고, 그는 결국 결과에 이의 없이 승복해 냈다.

나는 오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라는 그 뜻을 진실로 체감했다.



지난 학기의 성적이 오늘 정식으로 공표되었다.
예상대로 생애 최초의 A+를 받아낸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성과도 있다.
나는 역사상 처음으로 F를 단 하나도 받지 않은 학기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이번 학기 나는 단 하나의 F라도 받으면
9학기가 아니라 10학기를 다녀야 하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교수님들을 찾아뵙고, 여러 모로 사정을 호소하여 F만큼은 면하고 있었지만
오직 한 과목만큼은 F를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다.

그 담당 교수님께서는
원칙과 소신이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을 너무도 굳건하게 갖고 계셨다.

나는 기본적으로 교수님의 생각에 동의한다.
도서관에서 밤을 새며 공부를 한 사람들이 당연히 학점을 잘 받아야 하고,
나와 같은 사람은 학점을 잘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나는 지금까지 F를 받든, 학사경고를 받든
별다른 이의나 사정 호소 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렇게 넉넉하게 모든 걸 받아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F 하나로 나의 인생이 심각하게 바뀔 수 있는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아무리 깐깐한 교수님이라 하여도 오직 사정하고, 부탁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이 결국은 핑계, 자의적인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진정으로 정의로운 것은 그 어떤 상황까지도 감수해 내고, 용인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번에 그러지 못하였다.
27살에 맞이한 결과 하나가 내 삶을 좌지우지할 게 너무도 크기에
이번만큼은 나의 정의를 포기하고, 실리를 택하고 말았다.
이러한 선택에 부끄러움은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교수님을 수차례 찾아뵙기도 했고,
메일이나 전화를 통하여 사정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으셨다.

그럴 수록 이런 부탁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사실 스스로에게 좀 구차한 느낌이 들어 그냥 F 맞고 말지, 하는 생각이 꾸준히 들어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盡人事待天命을 생각했다.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후에 너무나도 후회할 것 같았다.
F를 맞아도 좋지만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고 맞이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만족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10학기 째를 다니면서 그 때 좀더 노력했다면 이런 일 없을텐데 하며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계절학기를 들었거나 애초에 교수님들을 찾아뵙고 사정을 좀 했었다면
학교를 더 다니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를 지금 하고 있기에
후회를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후회하고 싶었다.



내 연이은 요청에 교수님께서는 귀찮았거나 부담스러웠던지
최후의 방편으로 학부장님의 승인을 받고 오라는 대안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교수님께서 상황을 모면하려는 한 수법밖에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학부장님께 가서 나 이번 학기 수업 좀 못 들었는데 학점 좀 주쇼, 하면 그래 줘라, 하고 월권을 행사할 학부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성적이의신청 마지막 날, 결국 학부장님을 찾아뵙고 만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상황을 말씀드렸지만
예상대로 학부장님께서는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셨다.
학부의 굵직한 일을 처리하기에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너 같은 학생 하나하나의 잘잘한 일까지 내가 처리해야 하느냐는 표정이셨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겸손하게, 그리고 정당하지 못한 일임에도 그럼에도 정당하게 말씀드리려고 노력했고,
학부장님께서는 결국 교수님과 말씀은 해보시겠다는 답변을 주셨다.



모든 위기가 해결될 것 같던 상황에서 다시 위기는 시작된다.
나는 그저 체면치레 말일 수도 있었던 학부장님의 말씀에 모든 희망을 걸고 다시 담당 교수님을 찾아뵈었으나
하필이면 그 날 제주도에서 세미나가 있어 교수님께서 제주도에 가셨던 게다.
다음 날 돌아오신다고는 하지만 내게 다음 날은 없었다.
그 날은 이미 성적이의신청의 마지막 날이었기에.

나는 교수님께 마지막으로 전화를 드렸고,
교수님께서는 세미나 준비로 바쁘다고 하셨으며,
나는 간략하게 다시금 부탁을 드린 후 통화를 끝냈다.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이미 다음 학기 수강신청을 하려고 계획했던 것을 전면 취소하고,
F를 맞이할 상황에 맞게 수강신청 계획을 짜다
탐탁찮은 마음에 관둬 버렸다.



그렇지만 기분이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이번 일은 애초에 내가 욕심을 부린 것이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했으나 결과가 안 좋았을 뿐이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하여도 지금보다 더 잘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니
별 원망이나 아쉬움 없이 그냥 그대로 내게 주어질 상황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 오늘.
이것은 내게 기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교수님께서는 F 대신 D를 주셨다.
포기 뒤에 오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얼마나 기쁜 것인지,
그리고 인간이 최선을 다하면 그만큼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이번 학기 여전히 학사경고를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열심히 공부한 학우들에 대한 내 양심의 표현일 것이고,
나는 그저 9학기만에 졸업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이 다시 생겼다는 것에 아주 행복하다.
앞으로도 난관은 많겠다만. --;

그러나 지금처럼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면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
후회 없이 스스로에게 작은 위안은 남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깨달았다.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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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goob2003-01-14 16:56:23
비굴했을지 모르지만, 늦은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찌됐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은 듯한 느낌.
축하해. 9학기에 졸업하게 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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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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