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맛골에서... (2009-04-17)

Writer  
   achor ( Hit: 1766 Vote: 7 )
Homepage      http://empire.achor.net
BID      개인

피맛골에 대한 추억이 많은 건 아니었다.

그 시절엔 으례 영화를 보고자 하면 종로로 향하기 마련이었고,
감상을 나누며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코아아트홀 주변에 도달해 있었다.
굳이 길 건너 피맛골의 그 협소한 골목골목을 찾아들어갈 일은 없었던 게다.

그렇지만
피맛골에 대한 추억은 특별했다.

그 좁은 골목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마치 정체된 도로에서의 차들처럼 긴 줄을 이뤄 골목을 헤집다가
아무 허름한 주점으로 들어서게 되면
억세지만 사람 좋아보이는 할머니는
다짜고짜 거칠게 구워낸 이면수 한 마리와
다 찌그러진 양푼에 넘치도록 가득 담긴 동동주를 떡 하니 상에 올려놓곤 했었다.

너무 많이 취해버렸던 그 날은
그렇게 종로 그 한복판에 뻗어 잠들어 버렸고,
아침,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느끼며 깨어나
터벅터벅 집으로 귀환했었다.

피맛골이 사라진단 소식에
꼭 한 번 다시 가보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내가 뻗어있는 자리로부터 30m 떨어진, 역시 대로변에 함께 뻗어있었던 yahon과
추억의 피맛골에서 조우했다.



그 협소한 길은 여전했지만
우리 외에는
꽤나 불량한 차림으로 몰래 담배피던 고등학생 무리들과
한 명의 손님이라도 잡아보겠다는 삐끼들이 전부였을 정도로
골목은 고요했다.
가게들도 거의 다 문을 닫은 채 간판 대신 임대 문의,란 쪽지만 붙여놓고 있었다.

10 여 년 전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몇 안 되는 문 연 가게 중
발길 닿는대로 들어선다.

막걸리가 맛있다.
어쩌면 삶의 마지막 피맛골 막걸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못내 아쉽다.



바꾸지 않을 수는 없을 게다.
협소한 골목, 다닥다닥 붙어있는 가게들, 빽빽했던 사람들...
이곳, 불이라도 나버리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추억의 한 자락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어
아련한 삶의 향기를 품어주고 있던 공간이 사라져 간다는 건
슬픈 일이다.

- achor


본문 내용은 5,689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diary/1203
Trackback: https://achor.net/tb/diary/1203
RSS: https://achor.net/rss/diary

Share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achor Empire2017-06-05 00:24:46
문화일기 180 다큐멘터리3일 503회 피마길에서 만난 뜨거운 인생 - 종로 돈의동 갈매기살 골목 72시간
+ 다큐멘터리3일 503회 피마길에서 만난 뜨거운 인생 - 종로 돈의동 갈매기살 골목 72시간 http://www.kbs.co.kr/2tv/sisa/3days/view/vod/2550713_114145.html 2017-06-04(일)22:40 KBS 2TV...

Login first to reply...

Tag
- yahon: 드라이브를 위한 드라이브 (2010-12-13 00:56:06)- 분실: 휴대폰 분실 (2017-04-08 11:58:05)

- yahon: 199804 유명한 삼형제 사진 (2002-04-07 17:51:37)- yahon: 40번째 생일을 보내고... (2016-12-31 03:01:51)

- 분실: 휴대폰 분실 (2018-02-06 20:42:51)- yahon: (아처) 춘천가는 기차 (2001-04-09 01:37:00)

- yahon: House Party (2017-03-26 11:26:09)- yahon: 그들의 생일을 보내고... (2009-03-17 22:13:55)

- 종로: 국립민속박물관 (2017-11-24 08:54:43)- yahon: 7년만에... (2003-05-05 02:24:31)



     
Total Article: 1960, Total Page: 273
Sun Mon Tue Wed Thu Fri Sat
      1
Backup
만우절
2 3 4
5 6
두물머리
당신의 추억 [1]
7 8
윤중로
9
2nd
10 11
현수의 결혼 [2]
한 걸음
12
유통기한
13
면접을 보며...
14
북악팔각정
15
금전출납, 그.. [2]
16 17
피맛골에서...
18
19 20 21
운명 [2]
22 23
송강호와의 촬영
24 25
26 27
오랜 방황의 끝
28 29 30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Poll
Only one, 주식 or 코인?

주식
코인

| Vote | Result |
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