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첫 승을 보며... (2002-06-04)

작성자  
   achor ( Hit: 1511 Vote: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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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월드컵에서의 첫 승리보다 나를 놀랍게 했던 것은 국민들의 반응이었다.
나는 그간의 삶 속에서 그토록 국민들을 뭉치게 한 일은 본 적이 없었다.
경기가 열렸던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을 비롯하여 해운대, 그리고 서울의 광화문, 대학로,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등
우리 국민의 놀랍도록 응결된 응원은 내게 충격이었다.

나 역시도 한국의 승리를 맹렬히 기원하고 있었지만
그 전 국민적인 응원은 쇼비니즘 성향이 다분한 일이었고,
그것은 분명 코즈머폴리턴의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스포츠가 갖는 힘을 생각했다.
적군과 아군이 너무나도 분명한 스포츠이기에 내부 갈등 대신 외부의 적을 함께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그렇지만 88 서울 올림픽과는 달리 이토록 열광적인 결집은
단순히 자국에서 열린 스포츠라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아마도 올림픽과는 달리 월드컵은 자국 경기가 한정되어 있기에 응원이 분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축구 자체가 다른 스포츠에 비하여 더 큰 열정을 만들어 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열정도 문화의 일종으로, 적어도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말이다.

또한 미디어의 힘을 다시금 느꼈다.
모든 방송사에 줄기차게 토해낸 월드컵 이야기는 국민들 최대의 화제를 월드컵으로 집중시켰고,
그것이 전 세계가 놀란 우리의 응원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를 했음은 분명했다.
만약 방송사가 6.13 지방선거 이야기를 내내 이야기 했다면 상황이 다를 지도 모르겠다.



요즘 많이 비판 받고 있는 모든 방송사의 월드컵 전경기 중계는
사실 다소 너무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월드컵 개최가 언제나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한 세기에 한 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시대를 살아갈 때 조금은 희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는 걸 삶은 이야기 해준다.

그렇지만 각 방송사의 중계방송은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송재익 씨는 몇 비유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줬다는 것에 너무 도취되어 있는 듯 싶다.
그의 화법 특징이라고 하더라도 잦은 비유는 이제 너무나도 식상해 졌다.
나는 그의 어설픈 비유가 싫다.
간간히 구사한다면 색다르다고 생각해 줄 법 하겠지만 가당찮은 비유의 남발은
즐거움이 아니라 짜증이다.
심지어 다른 캐스터까지도 그 언어를 왜곡하는 어설픈 비유 대열에 합류하고 있기에 더욱 걱정이다.

차범근은 갈수록 해설이 안정되어 가는 느낌은 받지만
그는 공과 사를 보다 구분해야 한다.
나는 결정적인 골 찬스를 살리지 못하는 차두리에 대해 비판하지 못하는 차범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축구선수로서의 영웅, 차범근은 좋아하지만.

그리하여 세 방송사 중 한 가지 중계방송을 선택하라면 나는 KBS다.
물론 이 선택에는 잘 나가는 것에 딴지를 거는, 영웅을 쉽게 만들지 못하는
우리 한국인 또는 나의 성향이 개입되어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폴란드를 2 대 0으로 이긴 직후 각 외국 통신사 홈페이지를 찾아다니며
어설픈 영어와 불어, 번역된 일본어 등을 통해 각국의 반응을 살펴봤다.

대체로 미국을 제외한 각국의 스포츠 헤드라인이 우리 축구 승리 소식이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행동 또한 쇼비니스틱했다.

세상을 알아갈수록 민족적인 성향을 조금씩 느껴간다.
직접적으로 외세의 침입을 당한 적 없는 우리 세대 또한 그 민족적인 성향을 버릴 수 없던지
내가 아무리 세계주의를 표방한다 하더라도 내부에 흐르는 나의 애국심을 막기 힘들다.
나는 적당한 애국심이 아닌 맹목적인 애국심이 존재하는 나라면 만족할 수 없겠다.

우리의 광신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응원은
지난 9.11 테러 속 미국인의 맹목적인 애국심으로 나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지난 동계올림픽 때 ohno의 반칙에 흥분했던 내 자신을 시간이 흐른 후에 반성했던 것도 다르지 않다.
심판의 판정에 이례적으로, 너무나도 크게 전 국민적으로 반발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니 우습고,
또 실제적으로 명확한 반칙을 심판이 오심했다 하여도 고작 금메달 하나에 쉽게 흥분했던 모습도 만족스럽지 않다.
ohno를 테러하겠다고 미국까지 건너간 딴지일보의 구봉자 트리오는 심각한 쇼비니즘의 산물이자 완벽한 코메디겠고.



단체적인 월드컵 응원이 아주 잘못된 일이라는 게 아니다.
알고 있다.
우리는 훌리건처럼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았고, 타국 또한 손님을 초대한 주인의 마음으로 응원해 줬다는 사실을.
이번에는 홀로 방구석에서 TV를 봤지만 다음에는 나 또한 다른 이들과 함께 응원하고 싶은 게 사실인데
다만 나는 우리의 외부를 향한 전체주의, 광신적인 애국심을 경계할 뿐이다.
나는 전체주의 예찬론자로서 사람들의 결집을 좋아하고 극단적인 개성으로 모두가 흩어진 사회를 싫어하지만
타국을 향한 전체주의라면 우리라고 KKK단이나 스킨헤드처럼 반민족적, 반국가적 색채를 띨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나는 그게 걱정스럽다.

어쨌든 다음에는 나 역시도 친구들과 밖에 나가 함께 응원해 봐야겠다.
물론 코즈머폴리턴의 마음을 가지고.
20대에 즐길 마지막 월드컵일 것인데 좋은 기억 하나 못 남겨 두는 건 억울할 것도 같다. 아마도 후회하리라.
지난 1998년의 월드컵, 광화문에서의 응원은 아직 내게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으니 이번에도 좋은 기억 하나 만들어 봐야겠다.

아. 사실 나가서 고생하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다. --;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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