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대란 (2003-01-25)

작성자  
   achor ( Hit: 1402 Vote: 14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1.
느지막히 자고 일어났던 오후 늦게, 인터넷은 먹통이 되어있었다.

내내 사무실 네트웍을 휘저으며 원인을 찾았으나
낡은 컴퓨터와 지저분한 환경이라는 오랫동안 풀지 못한 문제 빼고는 별다른 문제를 찾을 수 없었다.
지난 밤 자고 간 친구 녀석이 평소의 원한을 한 데 모아 복수를 하고 가버린 건 아닌가 의심해 보기도 했고,
미친 한국통신, 또 점잖치 못한 작당을 하는 건 아닌가 의심하고 있던 찰나.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왔다.
전국의 인터넷이 마비되었다는.



2.
전무후무한 대란 소식을 들었음에도 일단은 안도감이 컸다.
적어도 이 복잡한 랜선들을 뒤져가며 문제를 찾지는 않아도 된다는 데에서 기인하는.
사실 어딘가 오류가 생겼을 때 그것을 찾는 작업은 꽤나 귀찮은 작업이긴 하다.

그러나 안정을 찾고 나니
마치 공상과학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을 지금 겪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가능성이야 언제라도 상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한 국가의 네트웍 전체를 마비시킨다는 이야기는 역시 현실감 떨어지는 일이었다.
나는 이런 엄청난 사태를 내 삶에서 겪을 수 있었다는 데에 행복감을 느꼈다.



3.
사실은 주말 내내 외출해 있느라 이번 인터넷 대란의 피해를 체감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 행복감,
마치 침몰한 타이타닉의 생존자처럼, 훗날 오랫동안 회고되는 사태를 내가 직접 겪었다는 그 행복감에 기록 남겨둔다.

생사를 걸만한 무언가 아주 커다란 사건의 중심에 내 자신이 휩쌓이기를 희망했던 적이 있다.
언제나 살아남는 주인공이 아니라 항상 말 한마디 못하고 죽는 액스트라의 역할이라 하여도 상관 없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이 한순간에 벌어지는 그런 일 말고,
몇 시간 혹은 며칠은 지속되어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장 극대화된 스릴를 맛볼 수 있는 일 말이다.

이번 일은 마치 영화처럼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게 했고, 뉴스 전체를 장악하긴 하였지만
새삼 느껴진 영화와는 다른 진리,
그럼에도 시간은 동일하게 흐른다는 것. 그것은 분명했다.

어떤 이가 무슨 일을 겪고, 세상이 어떻게 뒤틀어진다 하여도
나의 일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의 결말과 같은, 무언가 끝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은 채로 삶은 계속 평소와 같은 속도로 연장되고 있다.

또 다시 월요일은 찾아왔고, 한 주는 시작되고 있다.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982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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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