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의 방문 (2003-09-25)

작성자  
   achor ( Hit: 1664 Vote: 10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1.
자정이 넘어 찾아오시겠다며 형님한테 전화가 왔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아주 기분이 상해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형님의 말투에서는
찾아가도 되겠느냐는 허락의 느낌 대신 찾아가겠다는 당위가 느껴졌다.

아무리 내가 늦게 잔다 한들
밤늦은 시간에 부탁 대신 통보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무척이나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통화를 끊고 샤워를 하며 다시 생각을 해보니
형님이 그 늦은 시간에 찾아오시는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자책감이 느껴졌다.

사실 나는 요즘 일을 거의 못하고 있었다.
형님이 걱정스러워 하시는 것도 당연하리라.



2.
그런 이해를 했고, 또 형님을 만나 이야기 잘 나눴지만
그 한 번 나빠져 버린 내 마음은 그닥 나아지지 않는다.

결국 내가 기분 나빠진 까닭은 형님의 방문 때문이 아니라
요즘 나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는 정말이지,
요즘 제대로 살고 있지 못했다.



3.
상해버린 마음을 달래고자 누군가와 전화통화라도 할까 했지만
전화기 속에 기록되어 있는 전화번호를 속에서
나는 마땅히 통화할만한 사람을 찾아낼 수 없었다.

어느덧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이 되어있었다.

하루라도 외출하지 않으면 왠지 사회 속에서 소회된 느낌까지도 받아던 적이 있던 내가
두문불출 하기 시작한 것은 한 2년 전부터인 것 같다.
묘하게도 그 때는
또한 나의 전성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너무 오만했던 것은 아닌가.

수북히 쌓여있던 명함들을 보며 마치 사회에서 어느 중요한 위치라도 차지한 양 착각을 했고
늘씬하고 섹시한 여자들 품에서 왕자라도 된 듯 거들먹 거렸던 건 아닌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려 버린 후 이제는 좀 숴야겠다며 착오를 범했던 건 아니었을까.



4.
걸고 싶어도 걸 수 없는 전화번호를 보며
나는 더욱 슬퍼졌다.

얼마 전 vluez는 청소를 한다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산을 떤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 때 원두커피를 버렸나 보다.

vluez로서는 내가 얼마나 그 원두커피에 애착을 갖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겠거니와
또 우리 습관상 뚜껑이 열러 있는 음식물은 보는 즉시 버려버리는 성향이 있기에
사실 vluez의 행동은 완벽히 정당했다.

그러나 남겨지는 나의 아쉬움 또한 금할 수는 없다.

그 원두커피에는 지난 크리스마스의 추억도 녹아있었고,
또 힘 없고 약하던 시절, 처형터에서의 여유도 스며있었다.

그러나 역시.
사물이든 사람이든 떠나가는 건 한 순간이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내가 두문불출 하던 시절, 나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다.

헤어진다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헤어져서 슬프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슬픈 일 같다.
나는 이 슬픔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사회로 귀환했을 때만이 그 깊은 슬픔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미쳐있다.



5.
연애를 다시 하긴 해야겠는데.

그리하여 며칠 전에는 한 성악인과 소개팅을 해보기도 했다.
감지 않은 머리에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간 나는
까만 정장에 자가용을 몰고 온 그녀와 대비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을 하겠다면야 무엇이 문제겠느냐만.

역시 귀찮음을 피할 수는 없다.
누군가 만나러 나가야 한다는 것, 이것은 이제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결국 나는 여전히 두문불출 할 것이고,
여전히 가끔 쓸쓸하고 외로워 하리라.
나는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미쳐 있으리라.

Absence makes the heart grow fonder.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710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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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이2003-09-29 17:43:01
5.번의 글이 가슴에 무척이나 와닿는군요.... 귀차니즘의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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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