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회갑 (2009-02-13)

작성자  
   achor ( Hit: 1804 Vote: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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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어머니 회갑

어머니 회갑이다.

어머니 회갑인 걸 깜빡하고 소개팅을 잡아놨었으니 나도 참 무심했다.
어제였던 그룹 회장님 회갑 이벤트로 그렇게 내내 바빴으면서도
정작 내 어머니 회갑은 깜빡했다니 심히 송구스럽기만 하다.

오전부터 무진장 비가 온다.
가급적 맑은 날만 운전하는 내게 있어서는
역사상 최악의 폭우다.

이런 날은 당연히 운전하지 않아야 하는데
아침부터 그룹 홍보실, CDO실과 미팅이 잡혀 있다.
현지 출근이다.
이 폭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isol의 핸들을 잡는다.

부천까지 갈 게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오늘은 가족끼리 저녁을 하고,
며칠 후 있을 아버지 회갑 즈음에 친지들만 모시고 점심 식사나 하기로 했다.
케익 하나 사들고 부천으로 나선다.
다행히도 비는 그쳐 있다.

누나는 제기동에서 쭈꾸미 요리를 포장해 왔다.
그저 프라이팬에 볶기만 하면 되는데 엄청 맛있다.

넉넉하게 사온 탓에 배부르게 먹었음에도 남았나 보다.
어머니는 싸가서 먹으라고 말씀 하신다.

홀로 산 지 어언 14년 차.
지금껏 어머니께 먹을 것을 받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먹을 게 있을 리 만무한 내 집이지만
차라리 굶었으면 굶었지, 냄새 나는 식품을 들고 지하철을 타는 건
내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다. -__-;

어머니는 그 점을 많이 아쉬워 하셨다.
여의도에서 자취하며 PD로 일하고 있는 동갑내기 내 사촌은
이모가 싸주시는 음식들을 잘 갖고 왔었나 보다.
게다가 때때로 이모는 그 사촌의 집을 찾아가 청소며, 빨래며, 요리며 해주시고 오셨었나 보다.

내 어머니는 그걸 매우 부러워 하셨었다.



그저 볶기만 하면 되는 쭈꾸미는 정말이지, 너무 맛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싸가라는 말씀에 생애 최초로 암묵적인 동의 표시를 했다.

사실은 차가 있어서 편히 갖고 올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어머니는 자신이 한 요리는 그간 안 가져갔으면서도
음식점에서 사 온 쭈꾸미를 처음으로 가져간다는 데에서 서운함을 느끼실 법도 하셨는데
너무나도 좋아하셨다.

왠지 죄송한 마음이 느껴졌다.



정말 별 것 아니다.
어머니의 음식을 가져와 주는 것.

그저 자식이 밥 한 끼 제대로 먹는 걸 걱정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몰라주던 내 자신이 죄스러웠고,
참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감사했다.

말로만 부모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하지 말고
작고 소소한 일부터 신경을 써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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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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