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물흐물 닭볶음탕 (2009-02-21)

작성자  
   achor ( Hit: 2137 Vote: 5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느지막히 일어난 토요일.
이미 오후 3시다.

밀린 집안 일 좀 해야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뒹굴뒹굴 하다보니 밖은 어두워져 가고 있다.

일단 더 늦기 전에 세탁소에 다녀온다.
아직 날씨가 꽤 춥다.

자. 다음은 설거지다.
난제들이 많다.

한 두 달은 숙성된 닭볶음탕이 완전히 흐물흐물 해진 채로 냄비에 들어 있고,
얼마 전 어머니로부터 받아온 쭈꾸미요리도 어느새 하얀 곰팡이가 피어있다.
밥통엔 완전히 딱딱해진 밥이 한 가득이고, 싱크대엔 내 모든 식기가 가득 쌓여있다.

우선 쭈꾸미요리.

하얀 곰팡이가 피어있다.
아, 참 맛있는 쭈꾸미요리였는데...

지난 주중 내내 집에 가면 이 쭈꾸미요리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내일은 꼭 일찍 퇴근하여 이걸 먹어야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이런저런 약속과 야근으로 일주일 내내 한 번도 집에서 밥을 먹지 못했다.

아깝지만 비닐봉지에 잘 담는다.

다음은 닭볶음탕.

이건 쉽지 않다.
너무 오래 됐다.
곰팡이 차원이 아니라 이미 화학작용을 시작하여 건더기는 흐물흐물, 국물은 검게 묽어져 있다.

엄청난 냄새가 진동을 한다.
위안에 들어있는 모든 게 역류할만한 냄새다.

괜찮다, 이 정도.
타인의 구토까지도 퍼올렸던 내 손이 아니던가.
일단 국물은 잘 걸러 버리고,
건더기는 양손으로 깨끗이 냄비에서 긁어내어 비닐봉지에 담는다.

후련하고 개운하다.
이걸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지난 두 달간 나를 짖눌러 왔었던 것도 같다.

사실 좀 귀찮아 하긴 하지만
이런 집안일은 내 삶의 소소한 행복감을 주는 일이다.
마치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나는 집안일을 하며
혼자 사는 삶을 새삼 체감한다.
자유와 책임이 공존하는 그런 평온한 삶을.

결혼을 하게 되면 이 내 소소한 삶의 행복이 깨질 지도 모른다는 게 작은 걱정이다.

어쩌면 내 부인은 두 달이나 방치돼 있는 닭볶음탕을 지켜보지 못할 지도 모르고,
매일매일의 청소와 설거지로 삶을 얽매이게 할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벌써 2월도 거의 다 흘러 있다.
엊그제 새해를 맞이한 것만 같은데 1년의 1/6이 지나간다.
이 시간들이 다섯 번만 더 지나가면 올해도 또 끝이라는 게 새삼 슬프다.

결혼을 하긴 해야할텐데,
걱정이다, 사실 별로 하고 싶지는 않다.

- achor


본문 내용은 6,273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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