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할 세상 (2001-11-19)

작성자  
   achor ( Hit: 2139 Vote: 22 )
홈페이지      http://empire.achor.net
분류      개인

지난 밤 너무 과음을 했나보다.
오랜만에 술을 마셨기도 했거니와 몇 달만에 만난 친구들과 연신 웃으며 술잔을 꺾어댔더니만
하루종일 뒷골이 땡기는 게, 몸상태가 말이 아니다.

이럴 땐 북어국 한 번 먹어줘야 하는데 갈등한다.
요즘 돈이 없다.
돈 없는 게 하루 이틀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며칠 전 440만원에 달하는 빚을 갚아냈다. 스스로도 참 대견하다.
물론 아직 조금 더 남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만족스럽다.

그랬더니만 통장에 남은 돈은 1만원 남짓이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젯밤 술자리도 내가 카드로 긁었지. !_!
훌쩍. 돈도 없는데... !_!
뭐 괜찮다. 1년에 한 번 있는 내 생일, 축하해 준다고 모인 친구들 위해 술 한 번 쏘는 것. 괜찮은 일이다.

고민 끝에 북어국 하나 먹기로 결심한다.
1600원짜리 북어국 하나 먹는다고 특별할 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집을 나서려는 찰나,
떨어진 쌀이 보인다.
기어이 쌀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다시 고민한다.
쌀을 사서 쌀밥을 먹을 것인가, 아님 라면만 먹고 살 것인가.
에잇. 이왕 써버린 거 팍팍 써버리자!
쌀까지도 사버리기로 결심한 후 집을 나선다.

오후 4시. 거리는 어둡다.
어두운 거리를 보고 있노라니 내가 햇살을 보지 못한 게 꽤 오래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햇살을 맛보고 싶다.
창문 사이로 밝게 스며드는 아침햇살 속에서 깨어나
어머니가 챙겨주시는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또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다가
여자친구와 만나 영화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한 번 풀리기 시작한 상상은 나를 완전히 풀어놔 버렸다.
굳이 택하지 않아도 되었던 이 길을 택한 내 자신에게 회의가 느껴지기 시작했던 게다.

나는 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경제학도로서 적당히 공부하여 적당한 직장에 취직하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면 되었을 것을
나는 왜 굳이 모험을 하고 있을까.
모든 게 귀찮고, 던져버리고 싶어졌다.

전화다.
거래처다.
좆됐다. --;

거래처 사장은 엄청난 공력으로 내게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아. 미치겠다.
기분 같아서는 니가 해, 씨발아, 말해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내 현실이고,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웬만한 요구는 다 들어줘야 한다.
다 돼지 yahon 때문이다. 그 인간, 다음 주에 기필코 죽여놔야겠다. --;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나는 내 지금의 삶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으면서도
또 가끔은 오늘처럼 평상의 삶에 아쉬움을 갖기도 한다.

물론 알고 있다.
무언가 얻고자 한다면 무언가 반드시 잃어야만 하는 경제학적인 진리를.
나는 평상의 삶을 포기한 대가로 만족스런 삶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법이니 상관 없다.

자. 불평은 그만 하고 문제를 해결하자.
어쨌든 살아야 하니 돈을 벌어야 하고,
돈 버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닌데 그런 일들은 하고 싶지 않고.
그렇지만 살 수가 없으니 살기 위한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돈을 벌자.
일단 지금 맡은 일들을 빨리 끝내주고,
한 번 미친듯이 일해서 대량으로 돈을 벌어들인 후에 빚 다 갚고, 전세 가면
그 날이 오면 다시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자.

아. 그래야지. --;
힘내야지. 끙. 젠장할 세상.
삶을 연명하는 데에도 비용이 소요된다는 게 당연하면서도 억울한, 그런 세상이다. 젠장할.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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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