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나는... (2001-11-23)

작성자  
   achor ( Hit: 2670 Vote: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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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요 며칠 나는 전혀 일을 하지 않았다.
무슨 용기 또는 깡따구였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계속해서 독촉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나는 무슨 영문인지 전혀 일을 하지 않았다.

지난 화요일, 학교에 오랜만에 갔다온 이후 나는 아주 피곤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학교에 가는 게 아니라면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며 소일했고,
그리곤 남는 시간에는 잠을 잤다.

그간 밀렸던 잠을 모두 보상이라도 받듯이
나는 시공에 상관 없이 잠을 잤다.
낮에도, 밤에도. 나는 대개 잠을 잤다.

좋아하는 채정안이 드라마에 나온다 하여 KBS 미니시리즈 미나,를 몰아서 보기도 했고,
엽기적인 그녀, 조폭마누라, 노랑머리2 등 유명했던 한국영화를 보아댔다.

그렇지만 내가 본 모든 영상물은 나를 실망시켰다.
재미있다던 영화들은 하나 같이 졸렬했으며, 웃음은 오직 언어의 유희,
이를테면 가장 큰 새가 짭새라든가 씨방새 따위의 가벼운 웃음이 고작이었다.
얼마 전 한국영화 거품론 운운하며 거창하게 나불거렸던 친구,나 해피엔드,가
왜 좋은 영화였는지 오히려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
해피엔드,는 엽기적인 그녀,보다 또 조폭마누라,보다 더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영화들은 드라마에 비한다면 훨씬 나은 편이었다.
아무리 채정안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나는 미나,를 세 편 이상 보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지상에서 가장 유치한 이야기를 어떻게 그토록 진지하게 다룰 수 있는지,
나는 너무나도 의외여서 KBS 홈페이지에 들어가 미나,에 관한 여러 자료를 찾아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작가. 나는 그런 인간이 드라마 작가가 될 수 있는 한국사회가 싫어질 정도였다.
내가 본 최악의 드라마로 나는 미나,를 단 번에 손꼽겠다.

또한 채정안은 이미지가 많이 변해있었다.
더 이상 내가 좋아했던 채정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채정안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겠다.
나라도 미나,에 출연 제의를 받는다면 저질 드라마임을 알면서도 심각하게 고민했을 게다.
채정안,으로서는 좋은 기회임이 분명할테니 말이다.
물론 내가 김민 정도라면 절대 출연하지 않았겠지만.

지난 수요일에는 친구 아버님께서 운명하셨다.
그리하여 나는 처음으로 친구 아버님 장례식을 다녀왔다.

사실 그리 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나오긴 했지만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으며,
대개의 초, 중학교 친구들처럼 나는 그를 그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친구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주저 없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을 가서 옛 초등학교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나니
요즘은 가끔 그 시절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오곤 한다.
비록 전화통화이지만 한 때는 아주 친했던 그 시절 친구들과 반갑게 해후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재미는 독특하다.

결혼식, 장례식, 그리고 옛 친구들과의 10여 년만의 해후.
나는 이 속에서 이른바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물론 재패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성장기 소년의 감성 따위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어제는 인터뷰를 했다.
몇 달 전부터 나는 시민운동 때문에 인터뷰 요청을 줄곧 받았었는데
내 아름다운 태만과 게으름 때문에 나는 그러한 요청에 소홀했던 편이었다.
물론 커다란 인터뷰는 즉각 반응하곤 했었지만
다소 개인적인 것들은 일상의 업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던 게다.

그리하여 어제, 그간 남아있던 인터뷰 요청들을 일괄 처리할 계획이었는데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기사나 논문을 작성했거나
주제를 바꿔 막상 만난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이화여자대학원에 재학중이라던 그 분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름다웠다.
美의 가치는 그리하여 선명하다.
사실 대충 인터뷰하고 빨리 돌아와 밀려있는 일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나는 최대한 진지하고 엄숙하며 경건하게 인터뷰에 응하고 말았다. --;

그리곤 오늘은 청소를 했다.
청소를 하고자 해서 그런 건 아니고,
아주 중요한 서류가 있었는데 이게 도무지 어디있는지 찾을 수가 없던 게다.
여기저기 찾다보니 모든 사물이 자리를 찾고 제대로 정렬되는 일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결국 그 중요한 서류를 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사실 큰 일이다.
그 서류는 두 가지 계약이 담겨져 있는 중요한 것인데 도통 찾질 못하겠다.
며칠 전 정장 안 주머니에 넣어뒀던 것 같은데 꺼낸 기억은 남아있지만
그 후 어디에 뒀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제 겨우 오전 11시 47분이라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요즘은 밤에 잠을 자다보니 낮에 내가 살아있다.
밖에 나가질 않아 지금이 낮이구나, 실감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슬며시 들어오는 환한 빛의 느낌은 아주 좋다.

그간 잘 쉬었으니 오늘부터는 다시 힘내서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다.
으쌰! --v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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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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