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200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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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2111 Vote: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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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바깥 날씨가 춥나 보다.
외출 한 번 안 하지만 대충 날씨를 알 수 있다.

가장 추운 날이 기다려진다.
물론 이미 지났다면 더 좋겠고.
나는 여태까지 사무실을 난방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직 컴퓨터들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내뿜어주는 열기와
그리고 전기장판 하나만으로 올 겨울을 견뎌내고 있다.
곧 가장 추운 강추위와 맞서서 나는 난방하지 않겠다는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고 있는 중이다.

자고 일어났더니 사무실 안 공기가 싸늘하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반팔을 입고 살아갔었는데, 그러고 보면 자연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급작스럽다.

침대에 누워 그 기사를 생각했다.
오랜동안 내게 잊혀지지 않은 채로 가끔 떠올라 버리는 그 신문 기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빠와 단 둘이 살고 있던 한 중학생이
택시운전을 하시는 큰아버지, 그리고 큰아버지의 아들인 대학생 사촌오빠로부터 수차례 강간을 당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친오빠마저도 그 중학생을 강간하여
결국 정신이상이 되었다던 그 중학생 여자 아이를 생각한다.

일단은 내 주변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문기사라는 점을 나는 내내 확인시킨다.
신문기사는 그대로 믿기에 너무나도 기자 편의적이다.

나는 부모님이 안 계신 여자 중학생 아이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려 본다.
대체로 모범생은 아닐 것이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남자 아이들과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겠고,
이미 섹스를 해봤을 지도 모른다.
또한 짙은 화장과 선정적인 의상으로 큰아버지와 사촌오빠, 그리고 친오빠를 성적으로 자극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선입견이다.
또한 패미니스트들이 본다면 버럭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90년대 초반 김보은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면 얘기가 쉽다.
의붓아버지에게 12살 때부터 강간을 당해오다 그녀의 남자친구 김진관이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사건.
그 시절 남성들 사이에서는 "너도 즐긴 건 아니야?" 식의 비아냥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하는 소리가 꼭 그 꼴 같다. --;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현실적인 가정을 한 번 들어본 게다.
나는 그 여중생이 선정적이든 말든
강간을 한 큰아버지, 사촌오빠, 친오빠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니 오해 말기를.
내가 아무리 좆나 섹시하게 생겼다고 참을 수 없어서 나를 강간하는 여자가 생긴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섹시하게 생긴 건 나의 자유고, 강간하지 않는 건 그 여자의 의무다.

어쨌든.

그렇지만 꽤나 의문인 것은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미친 파장이 기대 이하였다는 점이다.
신문에도 아주 작은 단막 기사로 실렸을 뿐더러 시민단체의 별다른 움직임을 이야기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참으로 대단한 사건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고이 간직해 왔던 윤리와 도덕을 그 뿌리부터 흔들리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친인척간의 섹스가 자연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았다는 단면을 나는 보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나는 이 사건을 통해 현실적으로 느끼게 된다.
태초에 인간이 대량으로 제작된 게 아니라면 초기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근친상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인데
그렇다면 후세는 모두 근친상간의 결과물, 필연적으로 열성일 수밖에 없다.
만약 근친상간이 열성을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

모든 진리가 담겨져 있을 것 같은 자연은 우리의 윤리, 도덕과 일치하지 않는다.
자연은 약육강식을 말한다.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고, 먹이를 구하지 못하는 사자는 배고파 죽는 게 자연이다.
그러나 사회는 모두가 다 같이 잘 살기 위해서 윤리와 도덕, 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의문이다.
왜 다 같이 잘 살아야 하는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자연스러운가.

다시 의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세상은 살만한 세상인가.
근친상간하고, 힘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정령 자연스러운 세상인가.

또 다시 의문이다.
왜 잘 살아야 하는가.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당연한 건 아닌가.

아. 전화다.
사법고시 된 친구가 한 번 쏘겠다고 사무실 앞에서 기다린단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고 일단 나가봐야겠다.

Cowboy Bebop의 대사가 생각난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고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인간이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했다고.
신, 천국, 지옥, 윤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310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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