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동안 (2002-11-14)

Writer  
   achor ( Hit: 2224 Vote: 17 )
Homepage      http://empire.achor.net
BID      개인

오늘은 거리에 멍하니 서있는, 그리 흔치 않을 경험을 두 번이나 했다.



그 첫 번째는 학교 가던 길이었다.
교재도 넣었고, 안경도 넣었고, 시계도 찼고, 향수도 뿌렸다.
뭐 하나 빠트린 것 없어 보였지만 역 개찰구 앞에서 지갑을 갖고 나오지 않았다는 걸 발견한다.

평소에는 주머니에 천 원짜리 몇 장은 대충 구겨져 들어있었는데
오늘은 그것마저도 없었다.
정말이지, 땡전 한 푼이 없었던 게다.

나는 역 앞에서 1분간 난감해 했다.
힘들게 각오하고 출발한 학교길인데 이토록 가당찮은 이유로 내 흔치 않은 등교가 무너진다는 것을 쉽게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결석.



저녁 때는 친구를 만나 술을 한 잔 했고,
나는 장난 삼아 내 핸드폰을 친구에게 건냈다.
그러나 친구는 그렇게 내 핸드폰을 지닌 채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친구가 버스를 타고난 직후 나는 내 핸드폰을 돌려받지 못한 걸 알게 됐으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던 게 아니기에
눈 앞에서 내 핸드폰을 지닌 채 떠나가는 친구를 보면서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핸드폰이 없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타격이었다.
내 핸드폰에는 사무실 열쇠까지도 달려있었기에 나는 사무실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또 별도로 친구들 전화번호를 적어놨다거나 혹은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도 전혀 없었기에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단지 핸드폰 하나 없었을 뿐인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다시 버스정류장 앞에서 1분간 난감해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갑은 갖고 있었기에
힘들게나마 핸드폰을 되찾아 무사히 귀환히긴 했지만 고생이 많았다.



나는 이렇게 아주 사소한 분실 하나로 내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문득 인간의 관계와 지금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단편적이고, 일시적인지 느끼게 되었다.

물론 이 같은 경험과 깨달음이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예전, 술을 좋아하던 시절에도 나는 종종 가방과 핸드폰 따위를 잃어버리곤 했었는데
그 때도 그렇게 한 번 잃어버리고 나면 많은 이들과 관계가 단절되는 일이 생기곤 했었다.

아무리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하여도,
아무리 단단한 우정의 신념을 표현한다 하여도
이렇게 한 순간에, 어떤 사소한 계기로 완벽한 단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관계란 어쩔 수 없이 상호적일 것인데
그 한 쪽을 지탱하는 한 축이 어떤 사유로 무너지게 된다면, 연락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렇게 양쪽 모두의 관계는 기억 속에 아스라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사실이 새삼 슬프게 느껴져 왔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알고 지내는 많은 사람들이
영원하리라 생각치 않는다.
언젠가는 각자 다른 관계들을 찾아 나와 단절될 것이고,
나 또한 새로운 관계를 정립시켜 나갈 것이다.
인생사 회자정리이거늘.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7,979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Post: https://achor.net/board/diary/692
Trackback: https://achor.net/tb/diary/692
RSS: https://achor.net/rss/diary

Share 밴드공유 Naver Blog Share Button

 형님2002-11-19 02:37:58
오랜만에 아처게시판에 왔는데 또 재미있게 보고갑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사소함에 의한 완벽한 단절.. 좋은 글이네요. 근데 내 홈페이지는 언제쯤 시작할 수 있을까... 아. 일이 끝이 없네~ 완벽한 일과의 단절이 오기를 기대하며 이만 ^^

 achor2002-11-19 07:59:41
다소 쑥스러운 감이 있어 말씀드리지는 못했지만
제가 요즘 시민운동을 한다 하여 조금 분주해 있는 순간에도 문득문득 형님의 고마움을 생각하곤 합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achor2002-11-19 08:00:23
물론 일도 빨리 끝내드려야겠습니다만... --;

Login first to reply...

Tag
- : 고민 (2003-03-18 03:15:24)- : 플랭클린플래너 (2012-01-01 14:30:41)

- : 나의 왕국은 언더 컨스트럭션 (2008-12-22 01:47:28)- : 자전거를 타는 방법 (2016-09-11 15:47:44)

- : 삶이 아깝다 (2008-10-07 01:06:03)- : 일상의 가치 (2012-05-01 22:59:10)

- : 의지의 한계 (2012-04-26 15:23:51)- : 27살의 답변 (2006-05-03 09:09:22)

- : 불면 (2002-09-12 06:00:35)- : 젠장할 세상 (2001-11-19 17:10:59)



  당신의 추억

ID  

  그날의 추억

Date  

  Poll
Only one, 주식 or 코인?

주식
코인

| Vote | Result |
  Tags

Tag  

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