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맞이하며... (2004-01-21)

작성자  
   achor ( Vote: 16 )
분류      개인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나갔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단순한 내 멋대로의 생활 기술에 의해
숫처녀를 농락해 버리듯이, 슬그머니 어린애의 목을 졸라보듯이
빈둥빈둥 하루 해를 보낸 것이다.



2004년의 설날은 다소 심심하다.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내 신상의 이야기를 해야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시골 가는 것을 포기한 데에다가
(아마도 이번 역시 친척들은 내가 올해는 졸업이 가능할 지 물어보리라. !_!)
vluez도 오후에 집으로 가버렸고,
게임은 계정이 정지됐으며,
그 외 하고 싶은 오락이나 놀이, 보고 싶은 영화나 만화도 없는 편이다.
당연하게도 연휴를 맞이하여 어디 놀러간다는 것은 내 상상 속에조차 존재하지 않고.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밖을 나서는 일은 내가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고,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요즘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그리하여 나는 문을 꾸욱 잠가놓곤 따뜻한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며
할 일 없이 시간을 축냈다.
특선영화들로 가득한 TV나 CATV 등을 보다가
별로 땡기지 않던 게임을 하기도 했고,
홈페이지를 조금 수정하기도 했으며,
일도 했다.
쉬는 날에 내가 일을 하기도 했으니 정말 말 다한 셈이다.

그렇게 맞이한 2004년의 설날.



어렸을 적에 나는 짤탱 없이 시골에 가야만 했다.
그 때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가야만 하는 당위의 문제였던 게다.

시골에 가면 나는 TV가 있던 안방 아랫목쪽 벽에 몸을 기댄 채
서울에선 거의 볼 수 없던 아주 두꺼운 이불을 덮고 TV판 특선영화들을 보았다.
물론 나 역시도 그 무렵
어제는 까치들의 설날이고, 오늘은 사람들의 설날이라는 얘기나
설날 때 잠을 자면 눈썹이 하애진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구라들을 듣으며 신기해 하기도 했다.

내가 명절 때 처음으로 시골에 안 간 기억은 그리 오래되지 않다.
스물 몇 살 즈음.
나는 독립을 하고 있었고, 사실을 별로 바쁘지도 않으면서 부모님 앞에서는 아주 바쁜 척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 바쁨을 핑계로 나는 내 생애 최초의 시골행 거부를 실행할 수 있었다.
대신 나는 당시의 여자친구와 서울극장 같은 델 가서 영화를 봤는데,
물론 명절 때 극장에서 영화를 본 일 역시 내 생애 최초의 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아주 놀랐었다.
명절 때도 이토록 서울에 사람이 많다는 걸 나는 성인이었던 그 때까지도 몰랐던 게다.



그랬다.
나에게도 명절은
고향행으로 분주했던 날로 기억되기도 하고,
연인과 영화를 보던 따뜻한 날로 기억되기도 한다.
나에게도 과거. 청춘은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지금.
2004년, 28살에 맞이한 설날은 좀 심심하게 보내고 있을 뿐이다.

사실은 이 여유로움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삶에 당당함이 없다면 여유로움은 조급함 내지는 불안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러기에.

흑흑.
vluez도, 형님도. 치사하게 다들 자기들만 애인 생기고. 훌쩍. !_!
용팔이도, 성훈이도. 치사하게 다들 자기들만 결혼하려고 하고. 훌쩍. !_!

- achor WEbs. achor


본문 내용은 8,130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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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goob
2004-02-03 18:49:24
아처야~. 꿉지가 먹여살려줄테니까 좀만 기다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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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4/20/2026 21:3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