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구년오월의 상념 (2009-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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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2041 Vote: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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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시.
창 밖에선 빗소리가 들려온다.
머그컵 한 가득 따뜻한 물을 담곤
인스턴트 커피 네 개를 털어넣는다.

오랜만이다, 머그컵 한 가득 인스턴트 커피.

일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신림동에선.
창 밖의 빗소리와 머그컵 속의 인스턴트 커피.

어딘가 정체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현재지향적인
쓸쓸한 분위기가 그립다.


요즘 좀 피곤했었다.
5월 초 연휴의 여파도 있었겠지만
하루하루가 정신 없었다.
육체적으로 다닌 곳도 많았고, 정신적으로 신경쓸 일도 많았다.

고즈넉이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인스턴트 커피 한 잔 마시는 여유가
내게는 매우 중요한 일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결혼 후에도 홀로 상념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이제 와서 자각한다.
나는 자기애가 너무 강했었다.
화초든, 애완동물이든
나 이외의 살아 숨쉬는 또다른 생명체에 신경을 써야한다는 사실을 귀찮아 했었다.

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레지스트리에 무언가 등록되는 걸 꽤나 싫어함에도 기어이 설치하고 만 플레이어에선
R&B가 흘러나온다.
홍대에서 들어봤음직한 클럽풍이다.

문득 내 취향은 무엇인지 궁금해져 왔다.
생각해 봐도 생각나질 않는다.

취향이 없는 게 내 취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또 딱히 싫어하는 것도 없는 관용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은
때때로 내 장점이 되는 것도 같지만
무취향이 취향이라는 말은 어쩐지 이상해 보인다.
그냥 무관심이리라.


비밀이 많다는 건 감추려는 게 많기 때문일까.
소통해 나가는 과정은 앞으로도 매우 중요할 것인데 걱정이다.

피할 수 없는 갈등 앞에서
솔직할 수 있는 용기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줄 아는 이해심 대신
시간 속에 감추고 덮어두는 일은 자신 없다.


결혼을 하긴 해야할 것인데 걱정이다.
그간도 내심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피상적이었을 뿐 실제로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준비된 것 하나 없다.

그간 무얼했나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는 없다.
착실하게 결혼을 준비해 왔을 나였다면 이미 지금의 나와는 완벽히 다를 것이기에.
단 한 번의 삶 속에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아온 내 자신에게
박수 칠 것까지는 아닐 지언정 쓴소리를 던질 생각은 없다.

먹고 사는 일이야 어떻게든 될 것 같은 낙관은 있다.
그렇지만 나 아닌 누군가와 정말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리버럴리스트를 꿈꿔온 내가 필연적이고, 당연할 간섭과 통제를 잘 참아낼 수 있을까.


역시 삶을 반추하는 일엔 시간이 많이 소모된다.
벌써 32시.
비는 이미 그쳐 있고, 날은 이미 밝아있다.

자, 다시 일주일이 시작됐고, 출근을 해야 한다.
꼬박 샌 밤이지만 피곤하진 않다.

비온 후 아침공기가 상쾌하긴 하지만
고독하고 쓸쓸한 느낌이 그리운 월요일 아침이다.

- achor


본문 내용은 5,610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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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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